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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단교리분석·반증48>2013-08-23 09:38
작성자 Level 8

안식교 ‘칠십 이레’ 해석 비판

  정운기 목사         
· 하나님의성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
· 대전양무리교회 담임

 안식교는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 예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다.
 “시기에 관한 예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언적 시간의 하루는 문자적 태양력 1년에 해당된다는 성경 원칙이다(민14:34; 겔4:6). 이 연-일(年日)원칙에 따르면 70이레(혹은 예언상의 490일)는 문자적인 490년을 대표한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단9:25) 이 기간이 시작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이 칙령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Artaxerxex)왕 제칠년에 반포되어 주전 457년 가을에 효력을 발생했다(스7:8, 12~26, 9:9). 예언에 따르면 칙령 후 483년(예언상의 69이레)에 ‘메시야 곧 왕’이 나타날 것이었다. 주전 457년으로부터 483년을 계수하게 되면 주후 27년 가을이 되는데, 이때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공중 봉사 사업을 시작하셨다. ... ‘때가 찼다’(막1:15)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이 시기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언급하는 것이다. 70번째 이레의 중간 즉, 주후 31년 봄, 정확히 그리스도의 침례 후 3년 반이 되던 때에 메시야는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제사 제도를 끝나게 하셨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pp.61-62)
 안식교에서는 칠십 이레를 해석함에 있어 이천삼백 주야의 해석과 동일하게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칠십 이레의 기간을 490년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안식교에서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민14:34과 겔4:6은 앞의 글(안식교 조사심판 교리 비판4)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이 1일을 일년으로 또는 일년을 1일로 환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징벌받는 기간을 예언하셨거나 에스겔의 상징적인 행동의 기간으로 삼았다는 것이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해석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식교에서 칠십 이레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490년의 기간을 주장하는 것은 마지막 한 이레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해의 전후 7년간의 기간으로 맞추기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먼저 글에서 반증한대로 칠십 이레의 출발점은 아닥사스다왕 칠년(주전 457년)이 아닌 고레스왕 원년(주전 538년)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다고 보면, 칠십 이레를 문자적인 490년 기간으로 맞추어 해석한 안식교의 년대 계산은 다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십 이레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인가?
 먼저 칠십 이레를 해석함에 있어 정통교회 내에서도 세대주의의 해석을 따르는 분들이 있으나 필자는 세대주의의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 본 글에서는 세대주의적인 해석의 문제점도 함께 밝히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칠십 이레’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원어적 해석을 살펴보자.
 “여기 ‘칠십 이레’(...)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 할 것은, (1) ‘이레’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일곱들’(sevens)이란 뜻이며 ‘칠십’이란 말보다 앞에 있어서 역설체(力說體)를 지니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란 어귀를 자역(字譯)하면 ‘일곱들, 그것들의 칠십’이란 뜻이다. 여기서 ‘일곱들’이란 말이 역설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 (2) ‘칠십 이레’란 말이 ‘70 주간’이라고 번역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주간(週間)을 의미하는 낱말은 보통으로 여성 명사 솨부오드(...)인데, 여기서는 남성 명사 솨부임(...)이 사용되어 그저 ‘일곱들’(7의 복수)이란 의미를 가졌다. 곧, 이 말이 주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말함이 아니고, ‘일곱들’이란 숫자가 상징하는 성격(신령한 뜻 있는 성격)을 말함이다. ...그러면 ‘칠십 일곱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결정하신 것이다. 곧, 그의 구속(救贖) 사업의 완성을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그 작정은, 그의 완전히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랠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朴允善, <;성경주석 에스겔서 다니엘서>;, 1972, 靈音社, pp.484-486)
 필자는 칠십 이레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는 박윤선 박사의 해석이 옳은 해석이라고 보며, 아울러 다니엘서 9:24-27의 칠십 이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전 총신대학원 교수였던 천정웅 교수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했다고 여겨진다.
 “즉 ‘70이레’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위하여 정하신 기간인데 성경 본문대로 3기간으로 나누어 성경본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제 1기간은 ’7이레‘ 기간이고, 이 기간에는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곽이 복구되는 기간이고 제 2기는 ’62 이레‘로 복구된 예루살렘이 발전을 거듭하되 예수님의 부활 승천까지 수난과 고난 중에 진행될 것이며 제 3기간은 구속 완성의 결과로 성전에서 매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완전 종식되어 버린 기간이다.”(천정웅, <;다니엘>;, 1991, 말씀의집, p.185)
 안식교에서는 단9:27의 한 이레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후한 7년으로 보고 있는데 단9:26의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는 구절은 마24:15-21의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분명하기에 한 이레를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한 7년으로 보는 안식교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단9:27의 ‘한 이레’에 대해서 세대주의에서는 마지막 세상 종말의 때에 있을 ‘7년 대환난’의 기간으로 해석을 하기에 이 구절은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대주의의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단9:27절의 ‘그가’를 단9:26절의 ‘한 왕’으로 해석해서 ‘7년 대환난’ 기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은 26절의 ‘한 왕의 백성’에서의 주어는 ‘한 왕’이 아니요 ‘백성’이 되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볼 때 27절의 ‘그가’가 26절의 ‘한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7절의 ‘그가’를 26절의 ‘한 왕’이라고 가정해서 보더라도 26절의 시대와 27절의 시대를 같은 시대로 보아야지 27절을 세상 종말의 시대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본다.
 둘째, 단9:27절을 예수님께서 마24:15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사건 때 이루어질 예언으로 말씀하셨고,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단9:27의 예언은 다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단9:27을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본다.
 셋째, 앞에서도 밝혔듯이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한 이레’를 7년으로 해석하는 것에 잘못이 있다는 점이다.
 
 석원태 목사는 단9:2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약의 도래됨, 곧 구속의 도래 즉 은혜시대가 도래함을 뜻한다. 동시에 사도들의 복음시대와 함께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의 어간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십자가 사건 후에 될 일을 가리키고 있다.”(昔元太, <;다니엘서강해>;, 京鄕文化社, 1993, pp.367-368)
 필자가 석원태 목사의 해석을 옳다고 받아드리는 이유는 단9:27의 ‘그가’는 26절의 ‘한 왕’이 아닌 25절과 26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며, 그래서 27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세우신 구속의 언약을 굳게 세우시기위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단9:24-27절 전체를 다시 요약적으로 살펴보자면, 단9:24은 메시야가 와서 구속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고, 단9:25-26은 육십 구 이레 후에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과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주후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그 후 맛사다 항전까지 이어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황폐케 되었다. 그리고 27절의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죄사함을 위한 새언약(눅22:20, 마26:28)을 한 이레의 기간 중에 굳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율법에의한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절반’의 원어(헤치)는 ‘반, 중앙, 가운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밤중’(출12:29, 삿16:3, 룻 3:8)으로 번역되기도 한다(바이블렉스 원어사전 참조). 그러기에 ‘이레의 절반’은 ‘이레 중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이 마24:15에서 인용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이 구절에서의 ‘황폐케 하는 자’를 박윤선 박사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 ‘황폐케 하는 자’란 말(... 쇼멤)은, ‘황폐케 된 것’이라고 번역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훼파된 성전을 의미한다. 여기 ‘쏟아지리라’고 한 것은,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성전에 대한 심판, 또는 자기 백성(유다 민족)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朴允善, <;성경주석 에스겔서 다니엘서>;, 1972, 靈音社, p.502)
 그렇기 때문에 26절의 “끝까지”나 27절의 “종말까지”를 세상의 종말로 보아서는 안 되고,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교의 종말이요,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필자는 ‘칠십 이레’에 대한 안식교의 해석이나 세대주의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단9:24-27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칠십 이레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위해 정한 기간으로 예루살렘 중건의 말씀이 있었던 고레스 원년(주전 538년)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의 기간을 세 기간으로 나누어 예언이 되었다. 처음 일곱 이레 기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복구되고, 다음 예순 두 이레 기간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나머지 한 이레의 기간은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구속의 은혜 언약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멸망시킴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율법적인 짐승 제사를 폐하신 기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