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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단교리분석·반증47>2013-07-25 12:16
작성자 Level 8

안식교 ‘조사심판’ 교리 비판(5)

  정운기 목사         
· 하나님의성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
· 대전양무리교회 담임

 안식교에서 단8:14의 ‘이천삼백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하고 2300년이 시작되는 기산점을 주전457년으로 삼고 있는 것에 관한 안식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70이레 혹은 490년은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정해졌다’(단9:24). 기본이 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타크(chathak)이다. 비록 이 동사가 성경에 단 한 번만 사용되었을지라도 그 의미는 다른 히브리어 자료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게세니우스(Gesenius)가 쓴 유명한 히브리어-영어 사전은 그것이 ‘끊어내다’, ‘분리하다’는 의미라고 적절히 서술했다. 이런 배경에서, 가브리엘의 설명은 매우 뜻 깊은 것이다. 그는 490년이 보다 긴 2300년의 기간에서 끊어내야 한다고 다니엘에게 말한다. 가브리엘은 490년의 기산점(起算點)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단9:25)라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기원전 457년, 곧 아닥사스다(Artaxerxex)왕 제7년에 해당한다(4장 참조). 490년은 주후 34년에 끝났다. 그리고 2300년에서 490년을 끊어 내면 1810년이 남는다. 2300년은 주후 34년 이후 1810년이 지나야 하므로 1844년까지 이르게 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p.440)
 
 안식교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반증해보자.
 이천삼백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앞의 글에서 밝힌 바가 있지만 이천삼백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하는 안식교의 주장을 옳다고 가정(假定)한 후에,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起算點)에 대해서 비판을 해 보고자 한다.
 안식교는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을 산정함에 있어 다니엘서 9장의 칠십이레 예언이 시작되는 기산점이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과 같음을 주장하고 있고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해석하여 2300년의 처음 시작부터 490년간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칠십이레에 대한 해석부분은 다음글에서 다루어 보도록 하고 본 글에서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에 대해서만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다니엘 9:25에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니 칠십이레의 기산점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식교에서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왕7년(주전 457년)을 기산점으로 삼고 있다.
 칠십이레의 기산점에 대해서 간하배(Harvie M. Conn)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70이레의 출발점을 알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곧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이다. 우리 한역에는 영(令) 곧 명령의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 ... (다바르)라는 히브리 용어는 단순히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 이 말씀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복구와 건축이다. ...여기에서 중심 되는 문제는 ‘언제 이 말씀이 공포되었는가?’하는 점이다. ... 우리가 받아들이는 학설은 요한 칼빈, 클리포드, 카일, 루돌프, 영 등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말씀이 공포된 해를 포로 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린 고레스 왕 원년(주전 538년)이라고 간주한다.” (간하배,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7년, pp.280-282)
 필자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주전 538년으로 보는 간하배의 해석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째는, 바이블렉스 원어 사전에 보면 ‘영’으로 번역된 ‘다바르’는 성경에서 “말, 일, 사건”이란 뜻으로 번역이 되고 있고,  “ ‘말’로서의 다바르 ( ... )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혹은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단9:25의 그 구절을  “너희가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로 번역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 예루살렘성전, 성읍’등이 중건되고 건축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성경의 여러 곳(사44:28, 대하36:22-23, 사45:1-13)에 기록이 되어 있고, 에스라 1:1-4에는 바사왕 고레스가 고레스 원년에 성전 건축을 하도록 조서를 내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교에서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아닥사스다왕7년(주전 457년)으로 주장을 하는데 이 때에는 하나님이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예루살렘이 중건될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아닥사스다왕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내린 것도 아니며, 단지 아닥사스다왕이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함께 올라가라는 귀환령을 내렸을 뿐이다.(스7:7-26)
 그렇기에 안식교의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굳이 아닥사스다왕7년을 기산점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계산하여 그 해를 기산점으로 잡아야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심(주후29년) 전후의 7년간을 칠십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의 기간으로 맞출 수가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기산점 주장에 나타난 안식교의 비성경적인 해석을 정리해 보자면, 첫째, 단8장의 ‘이천삼백주야’와 단9장의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 부터가 잘못되었다. 단8장의 이천삼백주야는 앞의 글(조사심판 교리 비판3)에서도 밝혔듯이 칠십이레와는 전혀 관련없는 기간이다. 이천삼백주야는 헬라시대의 안티오커스(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기 시작한 때부터 마카비 혁명에 의해 다시 정결케 될 때까지의 기간에 대한 예언이며, 칠십이레는 이천삼백주야와는 관련없이 메시야의 초림과 예루살렘 성전에 관계된 또 다른 예언의 기간인 것이다. 둘째, 칠십이레의 기산점은 주전 457년이 아닌 고레스왕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위에 인용한 안식교의 주장 중에 비경적인 점을 한 가지 더 비판해 보자면,  ‘하타크’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끊어내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이천삼백주야의 예언의 기간 속에 칠십이레가 포함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이블렉스 원어사전에 의하면 ‘하타크’는 ‘나누다, 결정하다’는 뜻이 있는데  이천삼백주야와 칠십이레가 서로 관련없는 예언의 기간이기에 지금 개역성경대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안식교에서 ‘끊어내다’로 해석하는 것은 ‘칠십이레’의 기간을 ‘이천삼백주야’에 포함을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으로 일치시키기위한 억지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안식교에서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아닥사스다왕 7년으로 주장하고,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과 같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자의적 성경해석에 의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생겨난 결과이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조사심판 교리 역시 비성경적인 거짓교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