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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목양논단-안기호 목사(총회신학원 학감)2013-09-05 13:09
작성자 Level 8

열매의 중요성과 열매를 맺는 원리 (요한복음 15장 1-11절)

‘참포도 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요15:1-11에 보면, 예수님은 ‘참포도 나무’로,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로, 그리스도인은 ‘가지’로 비유되어 있다. 이 비유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열매의 중요성과 그 열매를 맺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열매가 중요한 이유는 2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가지의 운명이 열매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원리는 4-5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2절에 의하면 사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도 나무에 붙어있고, 열매를 맺는 가지도 나무에 붙어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비유에서 말하는 ‘붙어 있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은 외형적으로 단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현상(現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무와 가지는 그리스도와 그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비유의 초점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에 있다. 즉, 그리스도와 그 성도와의 관계의 진실성은 외형적인 현상에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4절 앞부분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는 구절에서 ‘거하라’에 해당하는 ‘με&;#7984;νατε’(메이나테)는 ‘머물다, 거주하다’(to abide, to stay, to dwell)라는 뜻인 ‘μ&;#7952;νω’(메노)의 2인칭 복수 과거동사 명령형이다. 이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안에 거하게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는 말이다. 즉, 주 안에 거하게 된 그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계속해서 4절의 뒷부분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에서 ‘붙어 있지’에 해당하는 ‘μ&;#7953;ν&;#8131;’(메네)는 ‘메노’의 3인칭 단수 현재 가정법이고,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에서 ‘있지’에 해당하는 ‘με&;#7984;νητε’(메이네테)는 ‘메노’의 2인칭 복수 과거 가정법이다. 이 말은 가지가 지금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과거에 내 안에 거하였던 그 상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느냐하는 문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열매는 그러한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엡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말씀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하는 기원으로써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그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계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도 역시 불신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도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 이상으로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이 진정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하는 믿음의 진정성이라는 문제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일 뿐이다. 나에게 포도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으로써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결코 가지가 나무를 위해 어떤 일을 함으로써, 즉 열매를 만들어 냄으로써 나무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맺히는 열매를 통해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붙어 있느냐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 잡고 계시다면 우리는 저절로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 우리에게서 생명의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방법은 열매를 보이는 것 외에는 없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는 열매의 우열보다는 열매의 종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단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열매가 열려야 한다. 그 열매가 많으냐 적으냐,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다. 하지만 무화과에 포도열매가 열린다면 그 열매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는 열매는 맺는 것이 아니라 맺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지가 노력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여 사랑이라는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열매가 내게 맺혀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내도, 충성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음으로 해서 그런 열매가 보여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직분에 충성한다든지, 교사, 찬양 혹은 어떤 다른 일로 봉사를 한다든지, 이런 봉사직분에 충성한다는 것은 그렇게 열심히 해서 어떤 성과가 나타남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잘하든 못하든 이미 열심히 충성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때문에 맺은 열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직분이나 충성은 열매를 맺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때문에 나에게 맺혀진 열매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열심히 해서 얼마나 많은 성과가 나타났느냐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으며 얼마가 기쁨으로 하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때문에 봉사라는 열매가 맺혀져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충성함으로써 열매를 맺으려는 사람에게는 내가 했다는 자랑이 있다.

사람들은 몸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지고, 환경도 잘 풀려나가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사용하시고 나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혀지도록 만드시는 것이 형통이다.

사실 많은 성도들이 환난이나 시련을 겪거나 좌절과 슬픔을 당할 때, 훨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신앙이 깊어지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만이 나의 즐거움이고, 나의 기쁨이 되는데 있다. 성도의 삶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것이요,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만 우리에게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내가 그분과 얼마나 교제를 깊이 하느냐에 따라 내가 얼마나 그분에게 순종하며, 내 삶과 성품 속에서 그분의 모습이 얼마나 나타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어떤 곤란과 환난 앞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기쁨과 벅찬 감격을 가지고 있었다.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와의 동거가 깨질 때, 바로 이런 벅찬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게 되고, 내 열심으로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신앙생활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단지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으로 살라.. 성령으로 행할찌니”라고 말한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열매는 노력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으로 해서 맺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성품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좋은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성품은 그대로 놔두고서 행동만 좋게 나오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위선이라고 말한다. 성품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스럽게 좋게 나오는 것이다. 성품이 나무라면 행동은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 성품이 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주인이 되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품은 단순히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품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감격과 성령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지금 성령을 좇아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육체를 좇아 행하고 있는가를 구별해야 한다. 내가 하는 그 일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육체의 열매(자기 자랑)이 맺혀졌다면 그것은 종교성을 가지고 내가 한 것이지,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맺혀진 열매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종교성을 가지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도로서 일을 감당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모습, 즉 사랑, 겸손, 온유 등이 드러났느냐로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느냐 나쁜 나무에 붙어있느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에 붙어있음으로 해서 맺혀진 열매를 통해서만 우리는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눅3: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