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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바울의 삶에 나타난 단순성-안기호 목사2011-07-29 08:39
작성자 Level 8

바울의 삶에 나타난 단순성의 이해는 바울의 자족하는 삶, 훈련의 중요성에 관한 바울의 이해와 오직 예수에게 집중하는 그의 삶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그의 신앙과 삶은 선교 열정과 비전으로 귀결된다.

단순성의 깊은 내용 중에 하나가 만족이다. 바울의 만족의 상태가 빌4장에 나타난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사도 바울은 만족이라고 하는 점에서 온전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사용한 자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스’(α?τ?ρκη?)는 스토아학파에서 즐겨 쓰는 용어이다. 고후9:8(모든 것이 넉넉하여, α?τ?ρκειαν ; 아우타르케이안)과 딤전6:6((자족하는, α?ταρκε?α? ; 아우타르케이아스)에서도 사용된 이 용어는 ‘충분하다’(enough; sufficient; satisfied)는 뜻으로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의 운명에 만족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지위가 어떠하든, 반대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든(빌1:17), 부와 빈곤, 풍요와 궁핍함은 그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시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이었던 ‘자족’은 용어상 바울이 사용한 ‘아우타르케스’와 같은 용어인 ‘아우타르케이아’(α?ταρκε?α)를 사용하였으나 그 둘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스토아의 자족은 체념이나 자포자기에서 오는 자족이지만 바울의 자족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3)고 말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얻은 자족이다. 그러므로 스토아인에게 있어서의 만족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만 바울에게 있어서의 만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스토아인의 만족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이지만 바울의 만족은 ‘신급자족’(神給自足)이다.

스토아철학의 만족은 금욕주의적 성격이 매우 짙다. 그래서 그들은 소유를 배격하면서 궁핍에서만 만족을 찾는다. 그러나 바울의 단순성은 궁핍과 풍부를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자족하는 단순성은 소유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지 않고 소유를 즐길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로이 할 수 있게 한다.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바울의 자족을 영적 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해소하는 궁극적 치료라고 말한다. 이 자족이야말로 영적 생활의 모든 염려, 슬픔, 불만을 치료하는 본질적인 자원이라는 것이다. 이 만족이야말로 단순성이 주는 놀라운 결과이며, 자유이다. 바울의 영성 생활의 기초는 그의 긴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족하는 삶도 훈련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자족이 순간적으로 획득된 것이 아니라 ‘배운 것’(빌4:10-11)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영적 생활에 나타난 고독, 금식, 기도 등은 이미 유대교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진 것들이 있다(갈1:14).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우리에게 훈련된 생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모델로 바울을 제시하였다. 바울 자신도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4:9)고 요구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직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다(행9:9,11). 얼마 후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오랫동안 지냈다. 그는 시나이 반도의 외딴 광야에서 주님과 계속 교제하면서 다메섹, 예루살렘, 결국에는 고향인 다소로 돌아올 준비를 하였다.

폴록(Pollock)은 다메섹 사건 이후 바울에게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가정과 안전과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다소 언덕에 있는 광야로 사라졌다. A.D 41년이나 45년경 그는 사도 바울의 굴이라고 여겨지는 굴에서 주님의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너무도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14년 동안 그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가 후에 조심스럽게 3인칭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말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약 15년 후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얼마동안 봉사한 후 성령의 지시를 받고(행13:2) 소아시아 마게도냐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했다. 바울의 이 모든 능력은 개정하기 전 유대교에서의 철저한 훈련과 다메섹 사건 이후 그의 새로운 영적 훈련을 거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윌라드는 손 쉬운 방법으로 지혜와 선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성을 지적하면서 그런 손 쉬운 방법은 역사와 경험이 가르치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즉시 지혜’(Instant Wisdom)는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이며, 쾌락주의자의 이데올로기(Hedonistic Ideology)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지한 훈련을 소홀히 하는 현대적 경향을 비판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이방 교회를 세운 바울은 자신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하고 결실이 많았던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행한 증언(행20:18-19,33-35) 속에서 그의 지도자로서의 겸손, 인내, 희생, 청렴, 수고와 모본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동안 스스로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양했다(살전2:8-9, 살후3:8-9). 그는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마20:26-27)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원리로 알고 실천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단순성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삶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확실하게 바울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곳은 빌3장인데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 단락(빌3:2-11)에서 ‘육체에 대한 신뢰’와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을 대립시키고 있다. 바울은 육적인 장점들 곧 혈통, 할례, 흠 없는 율법 준수 등을 신뢰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최고의 것으로 여겼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표현한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최고의 열정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바울의 연약한 실수와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처럼 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의탁하기 위하여 자신을 훈련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이 전인격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도록 연단해 줄 여러 활동과 훈련을 거듭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열정과 헌신으로 나타난다. 기독교 영성은 선교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바, 바울의 영적 삶은 결국 선교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 사도의 선교 활동과 그 계획은 결국 예수의 선교 명령에 대한 철저한 헌신과 실천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경험한 그의 수고를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고후11:23-28). 복음을 위한 그의 희생이 몸서리치는 것이었지만 바울은 오마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롬1:13-14).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할 때 그것은 매우 사실적이며, 헌신적인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은 자기 희생이나 겸손, 정신의 자세를 표현하는 것으로, 영적 해석을 주로 해 왔지만 이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가 매일 죽음을 대면하며 응시하며 그것을 받아들인 현실이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삶은 그의 단순한 삶에서만 가능한 결과였으며, 그의 그리스도엑 집중하는 삶은 목숨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는 초연함으로 복음전파에 전심전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