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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부장의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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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7 14:34

식구가 네 명으로 늘면서 생활비가 더 많이 들었다. 적은 생활비를 가지고는 도저히 살아나가기가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족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남는 것도 없었다.
교회가 부흥이 되자 성미 하는 성도님들도 점차 많아졌다. 교회에서는 그 성미를 매월 두서너 말을 주었다.
우리 네 식구 한 달 먹기도 어려운 정도의 양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쌀이 떨어지면 가게에 가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었다.
나는 “왜 주의 종이 시장에 가서 쌀을 사다가 먹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먹어야 성도들이 복을 받는 것인데…”라고 물었다. 아내는 교회에서 주는 성미 가지고는 부족하고 어린아이들은 밥을 먹여서 학교에 보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도님들이 매주일 성미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면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인데 왜 그런지 의아해 하며 매월 한 번씩 성미를 주는 때에 내가 가보았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있지 않은 것을 보게됐다.
나무로 만든 되로 세 말을 주는데 성미부장이 쌀을 담아가지고 위로 올라온 쌀을 손으로 싹 밀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하여 “집사님, 왜 성미를 이렇게 됫박으로 줍니까?”라고 물었다. 그 집사님은 "세상에서 다 그렇게 됫박으로 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고 답변했다.
“집사님, 세상에서 어떻게 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주님께서는 ‘너희가 종에게 줄 때 넘치게, 흔들어 눌러서 넘치게 안아서 주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집사님은 순종하지 않고, 성미를 싹 밀고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의 종이 주는 대로 먹어야지, 어찌 성미를 넘치게 달라고 하냐면서 성도들 가정 가정을 다니면서 성미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성도들에게 ‘밥만 많이 먹는 목사’로 인식되게끔 보였다. 나에게는 큰 치명타요, 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성미부장은 성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그 성미마저 주지 않았고 나는 더 어렵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말을 잘못해서 더 어렵게 되었다고 하면서 걱정하고 근심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말로 싸울 수도 없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고 기도하는 길밖에 없었다.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산상으로 가서 기도하고 내려와 보니 아내가 성미부장이 병원에 입원했으니 세브란스병원에 가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성미부장이 나를 보고 침상에서 나의 손을 잡고 “목사님,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는 옆에 있는 자녀에게 목사님에게 쌀을 풍성하게 주라는 말을 했다.
나중에 그의 종합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인색하고 자만하고 무지한가?
천년 만년 살 것같이 생각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왜 그렇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욕심없이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성미부장은 며칠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