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생명의 말씀-김종열 목사2015-03-05 10:22
작성자 Level 8

소원을 믿음으로
(마15:21-28)

 김종열 목사
서울강남지방회 회장
참사랑교회 담임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기사와 이적은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도 바로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5:25이하에 열두 해를 혈루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옷에 손을 대었더니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돌아가려고 하는데 주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로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인은 두려워서 떨며 주님께 사실을 여쭈니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여인으로서는 병이 고침 받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신 것은 혈루 병이 고침 받은 것이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을 얻게 되었을 때 딸의 병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인의 딸이 고침 받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15:21)
종교지도자들은 인종과 지역을 차별하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가셨지만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없고 이 여인의 딸을 고치신 내용만 있는 것으로 볼 때 주님의 목적은 이 연인을 구원하시고자 함이 분명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다면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지만 오직 믿는 자만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막 7:24-25). 

둘째: 가나안 여인의 소원(15:22)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께로 나아갑니다. “다윗의 자손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여인은 한이 되고 원이 된 사실을 품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여인은 딸을 데리고 있지도 않았고 귀신을 쫓아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심정과 귀신이 들어 고통 하는 딸의 상황만을
주님께 아뢰며 은혜가 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 분명하다면 왜 예수님은 그 간절한 부르짖음에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셋째: 예수님의 반응(15:23-24)
제자들은 “그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주님께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고 그냥 보내소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네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느니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여인은 떠나가지 않겠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바램입니다. 빨리 소원을 들어주고 보내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하기만 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거절이아니라 가나안 여인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이 여인이 딸의 치료만 받고 가면 소원은 이루어지겠지만 믿음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15:25-26)
여인은 예수께 절하며 더 간절하게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며 엄마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인이 듣기로는 자기를 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의 마음은 물러설 수 없었다. 주님을 떠나서는 딸이 고침 받는 소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소원이 이루어지는 믿음(15:27-28)
믿음은 신분과 환경과 상황과 감정을 뛰어넘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와 같이 취급해도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인정하였습니다. “옳소이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주님 앞에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신 그때부터 딸이 낳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두로 지방에 가신 목적은 병이나 고치러 가신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주님의 모든 행적은 우리의 소원이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빗나간 것을 죄라고 말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사도들은 주님이 분부하시는 일을 하려면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믿음을 더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5-6)
주님의 대답은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서 말씀에 순종하고 그 믿음으로 뽕나무에게 말하면 뽕나무도 네 말에 순종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소원을 믿음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소원은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