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온선칼럼-문찬우 목사2015-03-05 10:17
작성자 Level 8

공감과 상상(sympathy &; imagination)
마태복음 26: 41

2004년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박찬욱감독의 영화 <;올드보이(old boy)>;에 나오는 “누구냐, 너는?” 이라는 짧은 대사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영화의 설정대로 말하자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너’라는 사람은 질문자의 오랜 동창이기도 하고, 그의 원수이기도 하며, 냉혹한 소시오패스(sociopath)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한 마리 어린 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해 묻고 정의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고, 짤막하게 정리해 버리려는 거만하고 성급한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멋진 삶을 살고 싶어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지난한 삶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거룩하고 높은 이상은 오간데 없고 마음 구석에 동물적 허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스스로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장발장이 따로 있겠습니까? 조금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중간자적(中間子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속과 영성, 빛과 어두움, 지혜와 무지, 꿈과 절망 등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삽니다. 더불어 인생에는 교통사고처럼 다가오는 불가항력적 문제들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것은 이래저래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필요한 것은 바로 ‘공감의 능력’입니다. 나아가서 그 공감의 능력은 ‘상상의 능력’을 동반해야 합니다.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는 없어도 상상해 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문학이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보통 ‘문(文)사(史)철(哲)’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역사란 인간의 본성을, 철학이란 인간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바른 공부는 반드시 타인에 대한 이해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이제 “누구냐 너는?” 이라는 질문을 상대에게 던지기 전에, “누굴까 그는?”이라는 질문부터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연약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그러한 ‘사랑 가득한 공감과 속 깊은 상상력’의 전형과 모범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