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incarnation)이란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즉,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그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막힌 담을 헐어서 그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중보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사59:1-2; 엡2:13-14).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보여주는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인 구원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원리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하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가리켜 성육신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1. 성육신의 원리는 길의 원리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상담학자인 「스캇펙」은 수많은 상담 결과를 바탕으로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과 《끝나지 않은 여행》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약물남용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신병은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로부터 기인한다”고 했다. 즉, 사람들에게는 자의식 속에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천국’ 또는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성경에 의하면 에덴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에 가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진 담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의 본능은 비뚤어진 방향으로 진행돼 집착이나 중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에 집착이 강한 성격이상자들 혹은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자들은 사실 의지가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갈망에 대한 욕구가 더 큰 사람들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향으로 가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중독자들이란 누구보다도 영혼이나 신에 대해서 훨씬 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뒤틀린 것일 뿐이다.” 유명한 심리학자 「칼 융」도 어떤 치료 방법도 통하지 않던 한 알코올중독자에게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쩌면 알코올중독자란 다른 사람들보다 영혼에 더 목말라하는 사람들이고 혹시나 알코올중독이 영적 장애나 질환이 아닐까 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했다. 「스캇펙」은 본래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위의 책을 쓰고 난 다음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독교에 강하게 끌리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교리야말로 죄의 본질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일탈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돌아가 안기기 전에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찾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담이 생겼고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마치 코끼리 다리를 붙잡고 이것이 내가 의지할 기둥이라고 착각하는 맹인처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유사 종교에 귀의해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며 거짓된 평안에 속아 살게 된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그런 심리적 좌절이 그들로 하여금 집착 혹은 중독 등의 더 깊은 죄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어 주심으로 모든 죄값을 청산해 주셨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허물어 버리고 길을 열어 주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이다(히10:19-20).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와 영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의 육체를 깨뜨리신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와 영광을 떠나심으로 열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길의 원리란 떠남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하늘에서 떠나신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나를 버리고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하나님은 이 떠남의 원리를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의 삶과 우리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역사에도 적용시키신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인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고향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죄악된 세상의 모형인 우르를 떠나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으로 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더 큰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또 우리를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앉아 있던 세상과 죄악의 자리,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안일함과 아집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는 것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숱한 고초를 겼었다. 야곱도, 요셉도 모두 원치 않게 집을 떠나 죽을 고생을 다 겪었다. 하지만 비록 떠나는 것이 힘들고 마음 아픈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새 역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떠남의 원리를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자신의 아집과 자존심과 습성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난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을 의미한다(빌2:6-8).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하늘을 떠나 인간의 모습 그것도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내가 비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움의 삶을 권하신다. 놓쳐버린 돈, 잡지 못한 기회, 끓어오르는 분노, 사무친 억울함도 비워야 한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 가슴을 짓누르는 한숨, 돌이길 수 없는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후회와 자책감 등을 기억한들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떠남의 원리란 새 출발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는 새 출발을 권유하신다. 떠남으로써 목적지에 도착하고,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성육신의 역설적 진리를 체험하는 삶이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상처, 아집, 욕심, 자존심, 욕망, 미움, 슬픔, 아쉬움, 고통 등 모든 것들을 훌훌 떠나보내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2. 성육신의 원리는 진리의 원리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즉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곧 진리이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를 의미한다. 계시란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격과 사역과 삶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1:18; 14;8-9). 즉,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계시(아포칼립시스)란 말의 원문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 베일을 벗김”이라는 뜻으로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보거나 알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아노출”(God’s self disclosure)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을 오픈하셨다는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공개하듯이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오픈하셨다, 즉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원리는 계시의 원리, 즉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하였다. 이 평화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즉 복음을 영접하고 자신의 모든 죄와 못남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회개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태양이 아무리 강렬해도 뚜껑을 닫아놓은 항아리 속을 밝게 비추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거친 떨기나무와 무성한 잡초로 덥혀있는 광야의 한 모서리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최악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작고 초라한 광야의 모서리, 그것도 지극히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베들레헴이 갈등과 분쟁의 장소요, 무의미하고 군색한 마구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베들레헴이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는 평화의 장소요, 가장 영광스러운 왕궁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회개하는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께서 들어오신 나의 마음과 삶 속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즉시로 하늘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사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야곱이 브엘세바 광야 벧엘에서 꿈을 꾸고 난 후에 이곳이 하늘의 문이요 하늘의 전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꼭꼭 닫아놓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척박한 광야, 죄와 고통과 연단의 장소로 만들어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살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거룩한 땅,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만들어 그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에 하늘을 받아들이고 그 하늘을 품고 살아야 한다. 마음을 활짝 열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닫혀진 문들도 활짝 열려져야 한다. 마음 문을 꼭꼭 닫아걸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던 문들도 활짝 열려져야 한다.
3. 성육신의 원리는 생명의 원리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생명은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다(요15:13; 롬5:8; 요일4:9-10; 요3:16). 마치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의 결실로 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얻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들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리는 곧 사랑의 원리다. 그리고 사랑의 원리는 자기 존중의 원리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대강령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랑스럽고 존귀한 존재임을 알라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먼저 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자기 존중”에 있다. 자기를 가치없는 존재로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것이다. 돼지는 아무 곳에서나 뒹굴고 아무렇게나 살아간다. 자기 존중의식이 없는 돼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아무 곳에서나 뒹굴고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술 먹고 실수를 하면 “술 먹은 개”라고 하고, 먹는 것에 탐닉하거나 욕심을 부리면 “돼지 같은 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존재, 즉 자기를 존중할 줄 아는 존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닮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품성을 가진 존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존귀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화목하고, 나누어주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항상 자기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는 성결한 사람을 가리켜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죽은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담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들이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송과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라는 찬송이 있다. 여기에 나타난 가사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실 정도로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존재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성육신의 원리는 자기 존중의 원리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은총이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과 운명을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 자기를 낮추고 비워서 세상에 대한 미련 아집에 대한 미련 미움 상처 슬픔 같은 것들을 훌훌 떠나보내고, 항상 자신의 마음을 오픈해서 자신의 못남과 허물을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나 사람들 앞에 진실한 모습으로 관계를 맺어나갈 뿐만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그 마음속에 하늘을 품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괴롭고 힘든 환경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으로 만들어가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존중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인격과 삶의 모습 속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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