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시작한 후부터는 산행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전에는 산을 찾기를 좋아했었다. 그것은 내 주위에 바다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은 바닷가에 살고 있다고 해서 바다를 자주 찾는 것도 아니다. 바다를 자주 찾을 수 있으리만큼 여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에 내가 산을 자주 찾은 연유는 산에 미친 등반가와 같은 것이 아니었고 그저 막연히 산길, 산자락, 산의 숨결, 그런 것이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산 중에서도 산에 있는 바위를 좋아한다. 나는 산에 오르면 오래도록 바위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바위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바위를 만져보며 그 촉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바위를 사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바위는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 중후하고도 변함없는 침묵에 나는 압도당한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몇 억겁의 세월의 바람소리를 나는 읽는다. 혀뿐만 아니라 행동마저도 바위, 그는 침묵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제 보아도 영락없이 그 자리인 것이다. 불평 한마디 없고 하품 한 번 하지도 않는다.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표정 하나 변함이 없다. 연인들이 자기를 깔고 앉아서 진하게 속삭여도 털끝만큼도 투기하지 않는다. 마치 그는 목석같이 잠잠하고 말이 없다. 나사렛 출신 예수에게서 나는 이러한 위대한 침묵을 발견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바위를 둘로 갈라보면 그 가슴속에는 온갖 은구슬, 금구슬과 같은 아름다운 감정들과, 뜨겁고도 순한 사랑과, 때로는 참으로 정당한 항변과, 진한 고통과 상처, 몸부림이 곧 폭발할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코 경솔하게 폭발하지 않으며, 천 년 침묵으로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바위인들 어찌 분통 터지는 일이 없으랴마는 안으로 안으로 혼자 삭이며 도살당할 양같이 말이 없다.
바위는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무표정으로 심오한 삶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함부로 울고 웃고 나불거리지 않는다. 고독과 고통과 기쁨 따위도 초월하여 단지 묵묵히 눈감고 영원만을 살고 있을 뿐이다. 바위만이 푸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바위 등을 타고 수선을 피우는 개미 같은 인생들이 어찌 그의 삶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인간들은 바위 앞에서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각, 감정, 언어, 행동은 너무 흔하고 천하다. 비열하고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싯귀(詩句)에도 거짓이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인간의 가장 깨끗한 사랑도 탐욕이며, 인간의 가장 고상한 희생도 이기(利己)이다. 아무리 위대한 거인도 바위 앞에 서면 왜소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바위를 바라보노라면 언제나 아픔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다.
바위 곁에 서면 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 창 목사-갈릴리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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