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생명의 말씀-오일선 목사2015-03-12 12:26
작성자 Level 8

주의 일에 임하는 자세
(빌 1:22-26)

오일선 목사
천안지방회장
순복음포도원교회 담임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나는 알지 못하노라.’ ‘육신으로 산다’는 표현이 바울의 글들 가운데서 대개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하여 이곳에서는 단순히 ‘지상에서의 삶‘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옥중 순교도 유익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계속해서 생명이 연장된다면 복음의 열매를 더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지상의 삶도 유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의 바람만이라면 죽어서 속히 주님 곁에 가는 것이 좋으나, 교회의 일과 전도의 일을 생각하면 땅 위의 삶도 유익하므로(23, 24절) 그는 주저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같은 주저함은 조금이라도 육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로지 주님과 그분이 교회에 대한 애착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부분을 언급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놀랍다. 현세에 대한 모든 욕망을 내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 바울의 위대한 신앙이여!’라고 하였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 구절은 공동 번역 성서에 따르면 ‘나는 살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로 번역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바울처럼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임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바울 서신 가운데 빌립보서는 흔히 가장 개인적인 편지라고 불려집니다. 그만큼 빌립보서에는 따뜻한 정과 사랑이 흐르고 바울 자신의 심정이 솔직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로마의 감옥 안이었지만 편지 내용을 보면 결코 절망적이거나 회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소망과 화평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본문은 사역에 임하는 바울의 태도를 솔직하게 표현한 내용인데 여기에서도 그는 따뜻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전도 사역에 대한 열망을 설명합니다. 바울의 전면적인 고백을 통해 주의 일에 임하는, 진리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 24절). 사도 바울이 본서인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당시에는 로마의 감옥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재판 결과가 생사를 가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무척 좋을 것이지만 살아서 주의 일을 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아나서 사역한다면 그것이 여러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24절)
이렇게 진리를 따라 사는 자들은 삶과 죽음 모두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생에서의 삶에도 큰 의미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흔히 내세를 바라보면서 살기에 현실의 삶을 힘든 광야에서의 인생으로만 평가하기 쉽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일에 비중을 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생에서의 유익한 삶, 진리를 따라 사는 삶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끝내 보람도 기쁨도 없을 것이지만 진리를 따라 사는 삶, 진리를 행하는 삶, 타인들에게 안식과 기쁨의 비결이 되는 진리를 전해 주는 삶은 커다란 보람과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정 자신들을 주의 종, 주의 일을 맡은 자로 여긴다면 바울처럼 이 지상에서의 삶도 고귀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울과 같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진정한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기피하고 무가치하게 보면서 내세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결코 일꾼이나 종의 자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25절). 이 구절을 바울이 자신의 석방을 확신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이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확신에 찬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실상 바울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여러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수많은 준엄한 책망과 경고를 말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을 아끼고 사랑함을 표시하는 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참조, 고후 11:28 살전 3:10) 그의 책망은 안타까움의 표현이었지 결코 분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일을 담당하는 자들은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따른다고 하면서 다른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육신을 지니고 사는 이상 인간 누구에게나 약점과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감싸주고 잘 이끌어야지 그것을 비난하고 책망한다면 결코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보다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그의 지체인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는 진실 된 태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자신보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장 27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즉 바울의 요구한 바는 진리대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권면하는 바울 자신도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갖은 위협과 환난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열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준은 오직 복음,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명예와 학식과 자랑을 모두 버렸습니다. 세속적인 야망의 성취를 유보한 것이 아니라 아예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바라보고 사는 자의 자세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진정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중심이 된다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은 나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이 자신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아무리 그 일의 결과가 좋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분명 칭찬보다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기준으로 삼고 일할 때에 바울이 본문 2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쁨과 자랑이 풍성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