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 그 따뜻한 품을 향하여
오규섭 목사
얼마 전 모 지역 도민회의 축사를 맡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타지에 나와 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반가워하는 모습은 꽤나 인상 깊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온지도 수십 년이요, 고향에서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현재의 사회적 위치나 환경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들을 이어주는 끈이 있다면 오직 동향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친지를 만난 듯 친밀함을 과시했습니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것이 튼튼한 연결고리가 되어 주고 있었습니다. 고향이란 그런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잠시 적을 두었다가 내내 외지에서 살았다 해도 고향이 주는 편안함과 그리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인 허동인이 고향과 어머니를 동일시하며, 어머니가 곧 고향이고, 고향이 곧 어머니라 노래한 것이나 정지용이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며 애달픈 마음을 표현한 것도 고향을 향한 인간의 깊은 그리움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이 각 사람의 뿌리이자, 유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돌아가기 힘든 곳이라는 아쉬움이 강한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저마다 원래의 고향 즉, 본향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죽음이란 결코 끝이 아니며,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의 회귀이자 진정한 영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고, 저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표현법은 다르지만 결국 원래의 고향, 본향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향하고 있는 곳, 우리의 뿌리이자 최종 목적지가 되는 본향은 어떤 곳일까요? 그곳은 분명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아버지의 울타리처럼 든든하나 모든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오직 본향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이들에게만 그 따뜻한 품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도 내일을 준비하듯 삶 가운데서도 죽음 이후를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 이후 본향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혹 죽음을 그저 소멸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킬 필요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노래한 천상병 시인의 읊조림처럼 우리 또한 본향의 따뜻한 품에 안겨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 즐거웠음을 노래하게 되겠지요. 우리에게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인지 모릅니다. 본향의 따뜻한 품을 기대할 수 있어 더욱 살아볼 만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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