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경험 너머
(욥기 42: 5)
2014년에 노벨 문학상을 차지한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프랑스 작가, 1945-)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탐정이 자신의 소멸된 자아를 추적해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정체성까지 파괴하는 전쟁(세계 2차 대전)의 문제뿐 아니라, 나아가 한 인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을 남기는가, 하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억상실증(amnesia)이라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본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복잡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주인공 ‘기’는 무엇보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찾아갑니다. 맨 처음 그의 이름은 기 롤랑(Guy Roland)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그가 기억을 잊어버린 직후에 만난 흥신소 사장이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과정 중에-자신이 ‘프레디(Freddy)’라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신은 프레디가 아닌 ‘페드로(Pedro)’였음을 알게 됩니다. (본 소설은 그것마저 100%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는 자신의 국적을 알아내려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알고 있다가, 차츰 남미인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인으로, 결국에는 그리스인으로 국적을 수정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랑의 대상까지도 수정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프레디인줄로 알고 있을 때는 자신이 사랑한 연인을 ‘게이 오를로프’로 생각했으나, 자신이 페드로라고 깨닫게 된 뒤에는 ‘드니즈’로 수정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얻게 된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은 바로 ‘나를 나로 만드는 것 중에 매우 중요한 요소는 바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나를 찾는 과정 중에 전혀 다른 인물을 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재설정(reset)이 될 수도 있습니다.(기 롤랑이라는 이름이 바뀌니 사랑을 감정을 느끼는 대상도 바뀌지 않았습니까?) 내가 경험했던 것이 바뀌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도, 그로 인해 내 삶의 향방도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경험이란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의 경험들과 나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험들을 하기 전의 나와 경험을 한 뒤의 나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사람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던,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경험이던, 큰 성취와 성공의 경험이던, 그 반대로 실패와 상실의 경험이던, 경험은 우리의 인격과 영혼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 경험들이 부정적인 면이던 긍정적인 면이던 우리들의 내면과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가토 히사타케가 저술한 『헤겔사전』은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은 현실성에 대한 가장 가까운 의식인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서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경험이 사람의 내면을 만들어가지만, 그 사람의 내면은 다시 자신의 경험을 넘어선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으로 볼 때, 구약의 의인 욥이 했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말은 욥 자신이 ‘경험으로 만들어져, 경험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결국 경험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얻어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엄숙한 자기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