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벧후 2:1-3, 제목: 함께 있는 거짓 선지자
베드로는 이 편지를 시작할 때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소개하면서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한 것으로 역사가들이 전하는 데 특히 2장은 당시 교회가 직면한 이단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에 대한 서론으로 이 말씀만 바로 이해해도 우리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유익할 것이며 항상 분별력을 가지므로 개인이나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 할 것입니다. 순교로 생명이 끝났다면 그 삶의 여정의 곤고함이 많았을 터이지만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는 사명에 전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항상 우리들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거짓을 따른 결말은 그 끝이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마지막에 멸망에 처해진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지금 성도로, 혹 목사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나름으로 자랑할 만한 업적과 성과를 낸다한들 신랑을 맞지 못한 다섯 처녀의 신세가 될 수도 있고,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대로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여 내가 “주에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하고, 귀신도 축출하고, 능력도 행했다”고 강변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모른다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간에 자기의 업적을 말했지만 결론은 멸망으로 떨어지는데 본문 1절에 그 이유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드린다고 했습니다. 거짓은 항상 은밀하게 접근합니다. 특히 영적인 하나님의 일에서 조심할 일은 요일 4:12에 있는 말씀에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가 들어와서 하는 대표적인 일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야 얼마든지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 내면의 세계에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 무섭고 조심할 일은 본인 자신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데 “여럿이” 좇게 되는데 두 가지 현상을 말씀합니다. 호색하는 것과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 뜻을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무지에서라기보다 의도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탐심에 연루되어서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그런 것을 분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교단의 65년 역사, 한국교회의 130여 년의 역사,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이모든 과정에 거짓은 늘 함께 해왔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중요함과 시급성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 아니 내 일이 더 커 보이기 때문 일 것입니다. 본문 이후에서 강조하는 내용을 보면 거짓에 빠져 멸망하는 예들을 보면 구약의 사건들부터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알려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건치 못한 삶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미래에 약속 되었지만 현재적입니다. 약속된 구원은 생명의 완성으로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인데 이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또한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일 4:13-15 말씀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사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 얼마나 복되고 마음 설레는 말씀입니까. 이러한 말씀이 믿어지고 삶에서 경험되어진다면 거짓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고 따라 다닐 일은 더더욱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우리들 안에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들어있어서 눈과 귀가 어두울 때가 있을지라도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순종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커 보이던 세상 것들은 당연히 축소되어 지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질문에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 대답한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 이후에 전개된 이야기를 우리들은 대부분 잘 압니다. 마 16:23에서 베드로는 유래없는 책망을 받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 인가요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베드로를 더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인데 이렇게 책망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바로 고백하면서도 유대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바로 거짓선지자들과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현실의 문제가 시급한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의 전 분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성령충만 받은 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언행심사가 달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상존하는 거짓을 이길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듯하지만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우선 생각하면 거짓에 함몰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실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요 6:29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의 일에 열심 할 때,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때만 항상 있는 거짓을 분별하여 속지 않고 멀리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그 자리까지 우리 모두 함께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일산지방회장 , 순복음양의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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