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마지막 선택 출애굽기 11: 1 - 10
2012년, 여름이 되기 전에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약 2주간 거친 도시는 세 곳, 뮌헨,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였습니다. 약 6년 전 방문 시에 느낀 바대로 독일은 역시 깨끗하고 단단한 나라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친절하고 검소한 태도가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더불어 독일인들은 정확하고 합리적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아시아에도 독일과 비슷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일본입니다. 개화기에 독일의 헌법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 경제 등의 많은 분야를 벤치마킹한 일본인들도 시민의식이 대단합니다. 1991년도부터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한 경험을 통해 일본이 지닌 저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점은 그처럼 친절하고 깨끗한 두 나라가 역사상 최악의 전범국가라는 점입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대학살과 일본의 난징대학살, 인간 생체실험, 위안부 강제 동원 등의 사건들은 인간의 행위라고 생각하기조차 힘들만큼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일과 일본이 보여주는 최고의 시민의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회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혹은 국가지상주의(statism)에 의한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의 의식 있는 행동들이 개인적 양심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국가권력에 대한 맹종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전체적 흐름에 따라 또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언젠가 읽었던 변정수씨의 책 <만장일치는 무효다>의 내용처럼 획일적인 사고나 행동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만이며 더 큰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다행히도 전범국가 독일은 2차 대전 패전이후 꾸준히 반성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중심에 있는 광활한 땅 위에 유태인학살기념관을 세우고, 부단히 나치의 전범들을 공개 수배하는 등의 행동은 적어도 그들 스스로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시 전범국가인 일본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가관입니다.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필두로, “침략은 아시아 보호차원이었고, 위안부는 자신들의 자의로 선택한 직업이었다.”는 등의 한심한 말들만 연일 쏟아내고 있습니다. 일본이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핏대를 세우며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르짖는 요즘 성서의 출애굽(exodus)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자유권행사를 저지하던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반성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열 가지 재앙을 내릴 것이니 굴복하라!” 그러나 바로는 그 엄중한 소리를 무시합니다. 나일강이 핏물로 변하는 재앙을 시작으로 이집트는 점차 초토화되고, 결국 마지막 재앙인 장자(長子)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파라오는 히브리 노예를 풀어줍니다. 그러나 반성도 잠시, 이집트군대는 다시 노예들을 추적합니다. 종국적으로 파라오와 그의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며 참극은 끝나게 됩니다.
최근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파괴로 인한 일본 국토의 방사능 오염에 대해 여러 소문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정도가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약 7배나 되는 수치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일본이 당장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생산력에 있어서 일본만큼 탄탄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쓰나미가 약자들을 괴롭힌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천재(天災)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만약 그렇다면, 1945년 히로시마 원폭과 2011년의 쓰나미는 막 시작된 두 가지의 재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파리 떼, 전염병, 독종, 우박과 불덩이, 메뚜기 떼, 흑암, 그리고 장자를 치는 나머지 여덟 가지 재앙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비난이 아닌 호소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その 程度なら 十分では ないですか?”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