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목양칼럼-문찬우 목사2016-04-25 13:13
작성자 Level 8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사람의 자세

골로새서 3: 11

“아아, 목사님! 제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셨는지 모르실 거예요. 윤기가 나다 못해 물결처럼 출렁이는 머릿결에 희고 투명한 낯빛,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영롱한 푸른 눈동자까지!” 언젠가 목사실에 들어와 자신이 기도 중에 만난 예수님에 대해 간증했던 한 형제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간증은 제게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찾아오기 전에 봤던 한 장의 그림 때문입니다. 그 그림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법의학과 리처드 니브(Richard Neave) 교수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복원한 예수님의 상상도였습니다. 니브 교수 팀은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발굴한 약 2000년 전 셈족 남성들의 두개골 세 개와 당시의 풍습에 대한 연구 등을 바탕으로 컴퓨터단층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이용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니브 교수가 복원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매력적인 백안(白顔)의 미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검은 곱슬머리에 어두운 톤의 피부를 가진 평범한 중동인의 얼굴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서른 살까지 부친을 도와 목수로 - 보통 실외에서 집을 지으며 - 일하셨던 예수님의 피부가 백옥 같았을 리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AD 4세기경의 비잔틴 문화 때 처음 그려졌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유럽과 미국을 거쳐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된 종교사적 경로를 생각하면 그 형제의 예수님 모습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형상은 한마디로 '서구화된 그리스도(westernized Christ)'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의 서구로의 편중은 교회 미술만이 아닌 교회 음악에도 존재합니다. 대다수가 서양 종교화(宗敎畵)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백인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교회 음악 역시 서양의 클래식 음악의 한 갈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이 어떤 음악보다 더 교회 예배에 적합한 것이라는 편견도 실재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교회에서 한국의 전통음악은 어딘지 이질적인 무엇처럼 여김 당하며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음악에 담은 우리의 찬양을 접할 기회가 드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일전에 만난 한 국악인은 제게 이런 심정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이들이 우리의 음악을 미신적, 그러니까 샤머니즘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형편이에요.”

 우상숭배란 다름이 아니라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편협한 이미지 속에 가두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문화로든, 어떤 컬러로든, 어떤 음계로든 예수님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당신을 높이는 문화적 장르가 다양할수록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다양성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러나 어떤 문화도, 어떤 컬러도, 어떤 음계도 예수님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개인이나 민족이나 문화나 시대가 독점할 수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universal Christ)’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로새서 3장 11절의 말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는 사람이 지녀할 자세입니다.

 여호수아교회 담임, 호서대 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