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온선칼럼-문찬우 목사2015-01-09 09:05
작성자 Level 8

기억의 수작(酬酌)

고린도전서 13: 1 - 3

우리가 흔하게 겪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 앞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열을 내며 얘기 하는데, 듣고 보니 내가 전해 준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화자(話者)에게 이처럼 말합니다. “뭐야! 그거 지난주에 내가 너한테 해준 말이잖아!”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수면자 효과(sleeper's effect)’라고 칭한다고 합니다. 말의 내용은 기억을 하지만 출처나 주체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마치 자신이 한 말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민망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말 사람의 신념이란 믿을만한 것이 못 됩니다. 자신이 한 것을 안 한 것처럼 기억하기도 하고, 자신이 안 한 것을 한 것처럼 기억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종종 발생하는 해프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혈액형에 대한 착각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혈액형을 A형이라고 생각하여 평생 소심하게 살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자신의 내면에서 A형에 맞지 않는 외향적 성향이 발동하려 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아니야.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해. 안 그러면 다쳐.’라며 자신을 다잡은 적도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20여년 만에 종합검진을 받다가 자신 속에 O형이라는 급진적이고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아버리고는 아연실색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많은 시간 내가 아닌 나로 살아온 이 기분을 아세요? 마치 그건 베토벤이 바흐처럼 코스프레(costume play)를 하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프라하에서 출생했으며, 한때는 조각가인 로댕의 비서를 지낸 적이 있었던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 - 1926)의 서간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당신이 진실로 신(神)을 잃어버렸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혹시 당신은 한 번도 신을 믿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그리고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 신을 진실로 가졌던 사람이 조약돌을 잃어버리듯 그렇게 간단히 신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그의 질문의 의도를 떠나 그가 던진 화두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바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단지 신앙적 질문만이 아닌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는지요.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보면 유치한 소유욕이었을 뿐입니다. 정말 뜨거운 진실이요 충성이라고 믿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한 줌의 거품이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받는 충격은 참으로 깊습니다. ‘아아, 그것이 내 안에 존재하지 조차 않았구나. 나는 그간 무엇을 붙잡고 살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와 같이 갑작스런 각찰(覺察)은 오히려 다행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 말의 출처를 모르다가는 표절시비에 휘말릴 수 있고, 혈액형을 착각하고 살다가는 생명의 위기가 올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한 착각은 구원을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오늘 글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전람회가 부른‘기억의 습작’과 비슷한 제목으로‘기억의 수작(酬酌)’이 되겠습니다.

 

경기북지방회 온선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