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혈통적으로는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의 조상이다. 그의 믿음의 순례는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의 여정으로써 이 믿음의 여정은 ‘떠나라’와 ‘드리라’는 두 가지로 요약되며, 이것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단순성을 그 몸에 익히도록 하기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게 하는 영적 순례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떠나라’와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으로서 ‘믿음이 무엇이냐?’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그의 삶으로 말해 주었다.
1. 떠나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은 ‘본토와 친척, 그리고 아비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그의 부름은 ‘떠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비롯된다. 당시 종족사회에서 고향과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삶의 울타리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위험 속에 자신을 내 던지는 것을 뜻한다. 혈연, 지연, 익숙함 등 일체의 삶의 보장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분명한 목적지를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그것은 ‘무엇이’, ‘언제’, ‘어떻게’는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는 미래다. 그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다. 그것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막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정해지지도 않은 곳을 향해 무작정 순례의 길을 떠난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유랑하면서 때론 비겁하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희망은 점점 회의로 변한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은 실현될 가능성은 이제 전혀 없어 보인다. 사라는 생리가 끊어진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주 하나님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창15:2-3).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단 하나의 출구는 믿음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외에는 다른 가능성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성에 대해서 구약에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통찰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즉 세상 모든 일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바로 그것이 단순성의 요체이다. 아브라함의 ‘떠남’과 ‘기다림’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과 전적인 신뢰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2. 드리라
‘내 나이 백세고 내 아내 아이 구십이다.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며, 구십이 다 된 사라가 어찌 생산할 수 있으리요’(창17:17).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도 아이를 낳을 것을 믿는다. 불가능을 그대로 승인하면서 가능을 믿는다. 이것은 마치 그의 모든 것을 오직 믿음에 걸고 거기에 동동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고, 스스로도 위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밖에는 희망이 없기에 그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거쳐야 되는 과정이다.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순한 믿음의 성격이 철저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참된 믿음에 이르는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으며, 단순성이란 ‘쉬운 것’이 아니라 ‘역설적인 것’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과정을 거쳐 조련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본래부터 불임인데다가 생리까지 끊어진 할머니 사라가 아이를 낳았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다. 그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바램은 성취되었다. 이제 이삭만 잘 키우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 숨이 막히고, 착잡하고,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자칫 하나님을 등질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실에서 자신의 의지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한 가닥의 희망마저 제 손으로 끊어버림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요 희망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부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은 그의 믿음의 진실성이 순종을 통해 검증되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순종은 그의 신앙과 삶이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철저히 단순화 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순종은 내면화 된 그 믿음을 밖으로 끌어내어 외면화시키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순종은 그 신앙과 삶이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철저히 단순화 되어 있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안락한 현실의 보장인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떠났고, 인간적으로 기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 오로지 믿음이라는 밧줄 하나에 그의 미래를 내걸고 동동 매달려 있는 형국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단순함을 통해서 이삭을 얻었다.
나아가 현실에서 자신의 유일한 의지의 버팀목이요, 한 가닥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그 마저 제 손으로 끊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증명하였고, ‘절대적 순종’의 본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와 같은 ‘거룩한 순종’이 단순한 삶의 토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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