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상임운영위원 바위샘교회 담임
오래된 일이다. 월간 사상계(사상계)를 창간, 부정선거를 획책한 자유당과 맞섰고 이로 인해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군부독재가 등장하자 민주화 투쟁에 처절하게 항거했던 고 장준하 선생이 등산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비보는 모든 국민을 슬픔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고 장준하 선생은 한국 신학대학 출신으로 개신교 지도자였다. 그러나 5.16군사쿠테타로 집권한 군사독재 세력들이 유신을 내세워 3선 개헌을 한 후 영구집권을 시도하였지만 당시 한국의 개신교의 일부 지도자들은 "삼선개헌만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목청을 높혔던 참담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기에 발인예배는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명동성당에 2천 명이 넘는 조객이 참석하였고 발인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이곳 저곳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객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민주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떠나간 장순하 선생에 대한 아쉬움과 그의 생애에 대한 애잔함이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이후 많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고 장준하 선생 장례식 같은 감동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3일 평화교회 이봉춘 목사 장레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고 이봉춘 목사와는 별로 친분이 없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파주지방회와 경기북지방회가 통합한다고 해서 평화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이 최초의 만남이다. 통합지방회를 마친 후 평화교회에서 점심식사를 음식점에서 대접한다해서 음식점에서 대화를 나눈바 있고 평화교회에서 자녀일등만들기 세미나를 갖기로 해서 이 세미나에 참석한 정도다. 고 이봉춘 목사는 칠전팔기의 집념의 목사였다고 한다. 1994년 파주 평화교회를 개척, 파주 금촌지역에 3000평의 대지를 확보한 후 교회당 신축을 위해 노심초사했으나 군사작전지역인 관계로 지상에서 3M 이상 건축할 수 없는 고도 제한에 저촉되어 건물 건축이 불가능하자 이에 굴하지 않고 땅을 파고 지하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1000명을 수용하는 특이한 교회당을 완공하였으며, 2005년 파주지방회장, 2009년 파주지역 기독교연합회장 같은해 오산리기도원 부흥사협의회 대표회장, 파주시 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 교사협 부회장, 본 교단 부흥사회 부회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향년 67세로 소천을 했다. 발인예배는 1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했으며 예배가 진행되는 도중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설교를 담당한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는 최 목사 모친에 대한 예화를 들려주었다. 최 목사 모친은 최 목사가 10세 때 부친이 6.25 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혼자되었다고 한다. 그후 여의도순복음교회 교구장으로 최 목사가 시무할 때 육순잔치를 하려고 하였으나 회갑잔치를 갖게 될 경우 여의도 교인에게 부담을 앉겨줄까봐 회갑잔치를 뒤로 미루었고 칠순 때는 인천순복음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했지만 교인들에게 역시 부담을 줄까봐 강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모친이 소천을 하여 모친에게 효도관광 한 번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자괴감을 감당치 못해 몸저 누워있을 때 어머님이 꿈에 나타나 "최 목사 천국은 제주도 보다 진해 보다 설악산 보다 더 좋은 곳이야! 최 목사가 이곳에 오는 길을 가르쳐 주었어. 그러므로 괴로워 하지 말고 잘 살아야 해." 하면서 격려를 해 주셨다고 하면서 이봉춘 목사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우리 모두는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는 안되고 홀로 남은 사모님과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힘써야 한다고 설교를 했고 울음을 참고 있던 교인들의 흐느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조사 순서가 되었다. 조사는 일반적으로 가장 절친한 친구가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평화교회 김병호 장로였다. 김병호 장로는 “목사님,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홀로 떠나셨습니까? 하면서 시작된 조사는 절규에 가까웠다. 고 이봉춘 목사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고인의 약력소개는 3남 성광군이 하였다. 3남 성광군은 아버지가 사택에서 설교를 작성한다거나 원고를 쓸 경우 집에는 책상이 없어 어머니 화장대나 밥상을 가져와 사용했는데 자녀들이 근사한 책상을 하나 사 드린다고 했더니 큰 책상으로 하지 말고 작은 책상을 해달라고 해서 작은 책상을 아버지께 선물하였다며 흐르는 눈물 때문에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이봉춘 목사는 교회와 파주지역의 복음화와 지방회와 총회를 위해 살았다고 모든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었다. 평화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여 전도사는 이봉춘 목사는 별다른 재산이 없고 살고 있는 사택마저 은행에 근저당 해서 융자를 받아 교회건축에 전부 사용하여 빚만 남겨 두고 따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발인예배에서 교인의 흐느낌은 아마도 평화교회를 위해 몸바쳐 일하시던 고귀한 희생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이봉춤 목사의 장지는 평화교회에서 가까운 오산리 최자실 금식기도원 공원묘지였고 김원철 목사가 어렵게 마련했다고 한다. 하관예배의 설교를 맡은 김원철 목사(오산리 최자실 금식기도원장)는 이봉춘 목사가 헬스클럽에서 운동도중 거꾸러져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고 옆에 동행한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급한 전갈을 받고 헬스클럽을 찾았을 때 가슴을 만져보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며 헬스클럽에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내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과연 나도 소속된 지방회 목회자들이 전원 참석하고 지역주민의 애도 속에 장례절차를 치를 수 있을까?’ 주님을 위해서! 교단을 위해서! 지방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지역주민을 위해서! 이봉춘 목사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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