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목회자칼럼-서헌철 목사2016-04-25 13:09
작성자 Level 8

성도(聖徒)다운 생활의 은총을 누리자.

  오리겐의 삼위일체론 등은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내용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그를 “이단인가?”, “대중적 플라톤주의 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현대에도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가 정통기독교 위에 자신의 신앙의 토대를 세우기 위한 열정을 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온 생애를 바쳐 전적으로 헌신 봉사했으나, 거의 전적으로 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론이 없다.
 또한 오리겐에게 있어서의 구원의 본질이란 하나님처럼 되는 것, 즉 하나님을 관상(觀想)함으로써 ‘신성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 인간 영혼은 변화하는 이 세계에서 존재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등, 지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예수를 넘어 영원한 말씀에 이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한다는 것이 오리겐의 구원관이었다. 이러한 구원 개념은 철저하게 그리스사고인 것이었고, 성경적 기독교보다는 영지주의 안에서 더 일반적인 것이었다. 또한 구원의 과정을 타락의 반전으로 보아, 이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다시 하나님을 관상함으로 완성된다. 등을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오리겐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 ‘플루타르코스(역사가 플루타르코스와는 다른 사람)’는 가르침 받은 신앙대로 순교 했으며, 오리겐도 그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동행하였다고 전해지며, ‘헤라클리우스’도 세속적인 생활에서 떠나 성결 생활에 전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구속되어 법정에 끌려 나갈 때에나,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에도 오리겐은 이들 순교자들과 조금도 꺼리는 일 없이, 함께 해 줌으로 위험을 자취하곤 했다. 대담한 그의 태도에 군중들은 수차례에 걸쳐 그를 돌로 쳐 죽이려 했다. 그들은 그가 다수인에게 신앙의 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인하여 단체까지 조직하여 대적하는가 하면, 그가 살고 있는 집 주위에 군인들을 배치하기도 하였을 정도였으며, 그에 대한 박해는 날로 더욱 흉악해져, 그는 이리 저리 쫓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는 그가 몸 둘 곳 이라고는 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경건한 일상생활, 그리고 행동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하여, 신앙의 길로 들게 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생활 그 것이고, 그의 생활은 그의 가르침 그 것이다”라고(출처 = 기독교순교사)
  그러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일까? 바른 교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른 교리 못지않게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의 은총을 누려야 하지 않는가? 예컨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먼저 법의 적용이 엄격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있으며, 자신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옳은 주장, 바른 교리가 세워진다한들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이단자들이나 제도권 밖에 있는 이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나 이를 배척하는 이들보다도 낳은 것이 없다면 그 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진정성을 받아들여,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복을 누리려 하겠는가? 따라서 이 세대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은 ‘마이클 호튼’의 말한바 “교리는 삶이다”함과 같이 바른 교리가 있다면 성도(聖徒)다운 생활의 은총도 누려야 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장신교회, 장로회신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