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목양칼럼-문찬우 목사2016-06-17 16:02
작성자 Level 8

네 안에 나 있다

투과와 반사의 이중성

마태복음 7: 3

 “쟤는 왜 옷을 저 모양으로 입고 다닌데?” “난 저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나!” “저런 인간들은 모조리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해.” “제발 저 사람 좀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 지나가는 사람들이든, 미디어에 등장하는 명사이든, 주변 지인이든,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향해 지나치게 비판적 평가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적 해석을 따른다면, 그런 비판자는 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향해 자기비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자기 방어기재 중 하나인 투사(投射)로 자신의 내면의 부정과 분노를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고 건강한 시각을 지닌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비판적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한 가정의 아빠가 자식들 중 유독 못 마땅히 여겨 늘 구박하던 자식을 향해 오늘도 비난을 쏟아냅니다. “야, 이 녀석아.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기에 이 모양이냐? 응? 난 말이야 도대체 너란 녀석을 이해할 수 없어. 아니, 누굴 닮아 그런 거냐! 응?” 이런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빠의 어머니(즉 아이의 할머니)는 참다 못 해 한 마디를 합니다. “야. 이 놈아, 누굴 닮긴 누굴 닮아! 너 어렸을 때 딱 저랬다! 네 아들 하는 짓이 네 판박이구만 뭘! 아이고, 유전이 무섭긴 무섭다. 어쩜 지 애비랑 하는 짓이 똑 같을 수가 있더냐?” 아이를 향한 아빠의 비판의 이유를 할머니는 관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늘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습관적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손가락질 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난 역시 - 위에 제시한 아이의 아빠와 - 같은 이유로부터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죄 짓고, 넘어지고, 때 묻힌’ 타인들을 볼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분노한 이유는 타인을 통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관찰할 때마다 자신들 속에 숨어 있는 욕망과 충동을 보게 되었을 테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영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에 뻐근한 통증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필요 이상 분노하고 비판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지나치게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는 태도는 투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유리창은 두 개의 함의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투과(透過)이고, 다른 하나는 반사(反射)입니다. 창문을 통해 밖을(혹은 안을) 보려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보게 됩니다. 유리에 투과와 반사가 동시에 일어나듯,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타인을 관찰할 때 동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듯, 어느 순간이라도 타인을 볼 때 자신이 보인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1. 우선 상대에 대한 비난을 멈추거나 줄입니다. 2. 그리고 상대의 모습에 나타난 자신의 실체를 살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교만의 죄’를 피할뿐더러 ‘기만의 죄’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연인들의 표현, “내 안에 너 있다.”를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 안에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