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득음자 (갈라디아서 2: 20)
“어떤 사람들은 그럽디다. 아무리 외롭기로서니 자식을 곁에 둘라고 눈을 빼앗은 애비가 이 세상에 어딨것는가. 좋은 소리를 헐라믄 소리를 하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하기 땜에 그랬다구요. 허지만 그것도 어디 믿을 말이요?” “이제부터는 네 속에 응어리진 한(恨)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
결코 녹록하지 않은 영화, 이청준(1939 - 2008) 원작의 <서편제>에 나오는 대사들입니다. 이 영화는 일반인의 관점으로는 소화해 내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혹은 예술가의 삶’이라는 특수한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영화가 말하는 바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결국 인생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이고, 인생이란 고통과 비애라는 파토스(pathos)를 알지 못하고는 파악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그 슬픔의 응어리로서 끝나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하는 인생의 더 깊은 본질을 일깨워주는 예술의 또 다른 힘을 상실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소리꾼과 한 가지로, 고통을 모르는 신앙인도 깊고 힘 있는 말씀의 전달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관건은 그 상처를 어떻게 승화시키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점에 대해 헨리 뉴웬(Henri J. M. Nouwen)은 그의 유명한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 감정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상처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가 그저 부끄러운 과거나 흉터로만 남지 않고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수많은 상처 속에서도 치유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 하늘의 빛을 보고 눈이 먼 뒤에야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바울 사도의 이야기나 생의 고난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 욥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상세히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면의 어두움을 마주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되고,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의 소리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그런 영적 득음(得音)의 자리에 선 사람들의 고백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 20)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중략)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 3 - 5) 믿음의 득음자(得音者)들인 바울과 욥의 고백입니다.
청담동 여호수아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