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을 용기 마태복음 5: 39 - 42
어떤 자리에서였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 아세요? 사회생활하다가 보면 나 상처받았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뿐이라니까요! 교회에서 뭘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상처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겁니까?” 그 한 마디 말은 예리하면서도 묵직한 베테랑 목수의 정(鋌) 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뒤 며칠을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교회에서는 일반 사회에서보다 상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적 치유』, 『상처 입은 치유자』, 『상한 감정의 치유』 등의 오래된 책들이 여전히 기독교 서점의 한 자리를 &;#8210; 어엿한 스테디셀러로서 &;#8210; 차지하고 있음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사이에는 상처보다는 조금 더 세련된 단어인 ‘트라우마’ (trauma)가 대신 쓰이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인간으로서 상처를 전혀 받지 않고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과 ‘상처를 달고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더구나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그 상처라는 것에 남보다 더 많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웃으며 넘겨버릴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은 &;#8210; 정말이지 &;#8210; 이상하게 보입니다. 분명 성경에도 마음의 상처나 치유 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방식은 존재합니다. 잠언의 저자도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잠언 18장 14절) 등의 다분히 심리학적인 가르침들을 기록했고, 예수님께서도 상처 받은 사람에게는 더 세심한 배려를 보이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마음치유가 단지 우리의 한 상처만 제거해주는 일종의 소염진통제일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상처 자체보다는 상처를 이겨내거나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도 체질적인 변화(transformation), 즉 성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상처의 문제에 대해 그토록 집요한 이유가 어쩌면 영적인 감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는 유추를 해봅니다. 즉 ‘크리스천은 거듭난 영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악, 죄, 저주, 불결함 등에 대해 더 깨어있을 뿐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민감함(spiritual sensitiveness) 과 신경증적인 예민함(hypersensitiveness)은 구별돼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의 삶에는 불필요한 상처, 필요 없는 논쟁, 괜한 과잉반응, 그리고 그 흔한 ‘시험’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영적인 것과는 무관한 신경증적 과민반응에 기인된 현상들로 보입니다. 영적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지극히 육적이고 유아적인 모습들입니다. 온갖 적의, 반대, 공격과 죽음마저도 이겨내신 그리스도의 영(靈)은 단지 우리의 상처만을 치유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불필요한 것들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영적인 어른’으로 성장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들로부터 삶에 대한 많은 교훈들을 얻게 되는데,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42.195Km라는 거리를 맹렬히 달려가는 그 놀라운 몰입도와 노력 외에도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가르침을 더 얻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사소한 일에 신경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가에 서 있는 관람객 중 누군가 야유를 보내던, 마라토너의 옷이 촌스럽다고 빈정대던, 경기는 안 보고 스마트폰만 들려다보고 있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럴 여력도 없겠지만, 마라토너들에게 그들은 그저 삶의 여정에서 지나치는 배경일 뿐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상처를, 시험을, 분노를, 쓰라림을, 억울함을 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거나, 성숙하지 않았거나. 이제 우리는 상처를 치유 받을 믿음을 넘어서는 상처를 견디어 내거나 초월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는 성숙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