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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목양논단-오규섭 목사 교단 헌법위원장, 지방회 통합위원장2014-01-10 14:18
작성자 Level 8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한 지인이 모바일로 나에게 좋은 글을 보내왔다. 글의 제목은 “행복하십니까?”였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행복하십니까?”로 정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없다며 쩔쩔매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느냐?”고. 그의 대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돈을 갖고도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돈이 필요하냐?”고. 그의 대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권력을 갖고도 만족 못하는 정치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큰 권력이 필요하냐?”고. 그의 대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대체 행복이 어떤 것이기에 모두들 “행복, 행복”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철학자에게 물었습니다. “행복이 뭐냐?”고. 그의 대답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공부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였습니다.

많은 신도들에게 추앙받는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기도했지만 아직도 응답이 없다”였습니다.

수십 개의 계열 기업을 가진 대기업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행복이 뭐냐?”고. 그의 대답은 “그것을 알기 위해 평생 돈을 벌었지만 아직도 행복하지 않다”였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추운 거리에서 적선을 기다리는 걸인을 만났습니다. 폐일언하고 물었습니다. “행복이 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오늘 저녁 먹을거리와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니냐?”고.

그렇습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도 않고, 미래에 있지도 않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도적질해 올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하기 위해선 나 자신을 알고, 나만의 행복공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

글의 내용이 좋아서 나도 몇 몇 목사님들에게 보내주었다. 그랬더니 평소 아끼는 한 후배 목사님으로부터 답신이 왔다.

“오늘 새벽 예배 후에 카톡을 봤습니다.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유익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보내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보내주신 내용은 기쁘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마저 모르는 행복의 비밀을 거지에게서 배웠다는 내용, 행복이 단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과연 주님이 기뻐하실까? 더욱이 “행복하기 위해선 나 자신을 알고 나만의 행복공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생각의 결론은 이런 사상은 절대 그리스도인들이 전해서는 안 되는 사악한 사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불신자에게서 받았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이 된 목사님에게서 듣는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데보라 노빌》의 “감사의 힘” “긍정적 사고방식”을 전파하는 수많은 인본주의 무신론자들, 또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성공하려는 세속주의 목회자들의 체세술에 불과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긍정적 사고를 하나님보다 앞세워서 자신을 우상시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술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상은 결국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배교를 조장하는 마귀의 계략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추앙받는 목사님마저 사실은 행복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 결과를 생각하면 너무나 슬픕니다. 행복은 오직 행복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이지, 그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서 행복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TV에서 《닉 부이치치》는 신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얘기했지만 방송국에서는 단지 신이라고만 표기했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전하고자 한 것은 성경의 하나님이고 하나님 안에서 오는 행복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행복, 이 세상에서 오는 행복을 얘기한 것이라면 그는 여전히 불쌍한 사람일 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에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고 모든 불행을 이기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닉 부이치치》가 전하는 성경의 하나님 대신에 그의 긍정적인 마음, 사고방식을 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구나 목사님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긍정적인 사고를 전해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닉 부이치치》를 예로 사용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보내주신 카톡의 내용은 많은 신도들로부터 추앙받는 목사님께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알려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전했지만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을 전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 오직 하나님, 오직 성령님을 전해야 합니다. 너는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죄인이기에 항상 예수님 안에 있지 못해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죄인이기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종이 되고자 채찍질해주시도록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 글을 읽고 생각이 많았다. 우선 이렇게 장문의 답신을 보내 올 정도로 관심을 기울여 준 것이 고마웠다. 또 글의 내용을 보면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 복음 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선배로서 대견하기도 했고, 같은 목사로서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후배 목사님은 이 이야기의 주제와 핵심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오해를 하고 조금 성급하게 대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몸이 불편한 관계로 전화나 문자상으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기에 어려운 점이 있어 숙고하다가 지면을 통해 내 견해를 풀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그치기보다는 더 많은 목회자들이나 또 여러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33년 여간 목회를 해 온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이나 일반 성도들에게 우리가 어떤 글을 읽거나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그 말이나 글의 주제와 핵심을 바로 파악해서 대답을 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고언을 주고 싶기도 하고, 나아가 성경의 정신과 사상이라든지 복음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토론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다만, 나의 견해를 한 번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몸을 추스르면서 이 글을 써서 기고하게 됐다.

먼저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문제이다. 욕심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행복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다른 것에 정신 팔지 않고 쉴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근로자, 수십 개의 계열 기업을 거느린 사업가, 보다 큰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 많은 신도들에게 추앙받는 목사님 등이 주는 이미지는 상당히 열심히 그리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행복은 적극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거지에게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담긴 사상을 “《데보라 노빌》의 ‘감사의 힘’ ‘긍정적 사고방식’을 전파하는 수많은 인본주의 무신론자들, 또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성공하려는 세속주의 목회자들의 체세술에 불과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긍정적 사고를 하나님보다 앞세워서 자신을 우상시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술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상은 결국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배교를 조장하는 마귀의 계략인 것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야기의 핵심이나 주제와는 조금 많이 동떨어진 동문서답처럼 느껴진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욕심의 문제이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행복’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숨겨진 진짜 주제는 욕심이다. 욕심 때문에 행복해야 할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욕심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행복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넌지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성경의 정신과 사상

성경의 정신 내지는 사상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성경의 정신과 사상을 단, 한 단어로 압축하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마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랑입니다.” 이 대답에 이의를 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그렇다면 성경의 정신과 사상 내지는 복음의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성경의 핵심 구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역시 이구동성으로 요3:16을 들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고,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저를 믿는 자마다”이다. 이 둘이 만날 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를 믿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즉,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아주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신학적으로 성경의 정신에 좀 더 부합된 구체적인 표현을 원한다면, 요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구조에 입각하여 그 대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인간의 응답 역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신6:5),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골자는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으로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셨고, 인간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안에 있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전부, 즉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롬2:13-15)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은 사랑하지 못할 때, 그는 사실상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의인,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그 삶 속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비록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구원 여부에 관계없이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계명의 반쪽만 지키고 있는 사실상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이웃 사랑의 자세만큼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후배 목사님은 “목사님마저 모르는 행복의 비밀을 거지에게서 배웠다는 내용, 행복이 단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의 결론은 이런 사상은 절대 그리스도인들이 전해서는 안 되는 사악한 사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왜 목사가 모르는 것을 거지는 알면 안 되는가? 또 목사가 거지에게서 배우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 이러한 사상은 성과 속을 이원화 시키는 특권의식 내지는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의한 구원은 그 어떤 이론이나 윤리와 도덕 등과도 타협하거나 대치될 수 없는 유일한 진리이지만, 교회 안은 무조건 거룩하고 교회 밖은 무조건 속되며, 주일 하루가 나머지 육일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이론으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잘못된 이원론은 성경적이지 않은 상당히 위험한 사상이다. 물론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안에 세상과 함께 있다. 이 둘의 긴장관계에서 건강한 신앙과 신학이 유지된다. 한 목사는 “교회와 세상의 영역을 구분하는 성속(成俗)의 이원론이 문제가 아니라, 성과 속이 혼합돼 속(俗)에 의해 성(聖)이 잠식당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치우친 사상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속 이원론과 혼합주의 둘 다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회칠한 무덤 같으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뱀과 독사의 새끼들”(마23:25,27,28,33)이라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험한 표현들을 사용해 가며 혹독하게 비판하셨다. 그리고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할 것”(마23:33)이라고 단정적으로 정죄하셨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속된 무리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당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을 향해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고,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고 하셨다. 한 마디로 그 속된 무리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가 아닌 “그 삶속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행위가 나타나는 자”를 의미할 것이다. 일반 그리스도인이 아닌 목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주여! 주여!“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의 주제는 욕심과 행복의 상관관계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근로자, 사업가, 정치인, 종교인 등 사회의 모든 인사들을 망라하여 행복의 조건 내지는 본질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목사라고 해서 다 성자인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목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기도했지만 아직도 응답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진리에서 떠나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행복을 찾고 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목사가 현실적으로는 모르는(실천하지 못하는) 행복의 비밀을 거지는 비록 성경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느끼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사도 이런 자세만큼은 거지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또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심지어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지 않았는가(잠6:6).

행복의 자리는 어디인가?

성경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33:29)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행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쉬레’는 주석에 의하면 ‘충만한 행복’ 혹은 ‘완전한 행복’을 의미하며, ‘지극히 행복하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70인 역에서는 이 ‘아쉬레’를 ‘마카리오스’로 번역했는데, 예수님은 팔복에서 이 ‘마카리오스’를 사용하여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라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는 뜻이다. ‘가난’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토코이’는 눅16:20에서 거지 나사로에게 사용되었다. 실제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 있한 ‘거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인 것이다. 물론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거지를 가리킨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가난’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가난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즉 완전히 비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거지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졌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 믿지 않는 거지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에서 거지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이렇게 반문해 보면 어떨까? “예수 믿는 목사는 다 행복한가?”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거지는 다 불행한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욱이 목사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행복해야 한다. 문제는 실제의 삶 속에서 그들이 다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고 또 누리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반대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아가 거지들은 다 비참한 불행감에 빠져서 실제로 불행하고 살고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바로 마음속에 있다.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행복의 비밀을 담고 있는 창고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담겨져 있는 아주 소중한 부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을 다해야 한다(신6:5). 이 마음은 감정의 자리이며, 지식과 지혜의 자리이기도 하고(신8:5, 29:4),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 자리이기도 하다(욥27:6, 삼하24:10). 그리고 사람의 행위의 근원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고 말씀하셨다. 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고 하셨다. 이처럼 우리가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하여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은 모두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낮아지지 못하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아도 마음이 낮아지고 비운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본질적 차원에서의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행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목사들이 마음의 정욕을 비우지 못하여 그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돈, 쾌락, 명예 같은 것들을 쫓다가 뉴스거리가 되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음의 정욕을 비우고 낮아지라는 교훈을 함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정욕을 비우지 못하여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행복의 본질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마음이 비워져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6:8)는 성경말씀을 삶 속에서 체득하고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거지에게 가서라도 그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지의 행복은 긍정적&;#12539;적극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을 알고, 나만의 행복공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어도,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어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면 그는 행복할 수가 없다. 인간은 연약하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성취했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자기의 행위와 노력을 통해서 행복을 성취하려고 한다.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 그것을 알고 겸손하게 자신만의 행복공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공식은 물론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인간적인 성취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나타나는 현저한 모습이 바로 욕심을 비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후배 목사님은 “너는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죄인이기에 항상 예수님 안에 있지 못해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에 공감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울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슬픔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 안에 있을 때는 행복한데, 죄인이기에 항상 예수님 안에 있지 못해서 슬프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탕과 냉탕을 드나들듯 행복했다 불행했다가 반복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배도하지 않는 한, 어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은 기꺼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은혜로 대해 주신다.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1-39).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더 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1-8:2).

물론 죄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5:20). 그래서 오히려 더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롬6:1).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그 죄와 싸워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율법적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죄 때문에 슬프다고 했는데, 죄가 무엇인가? 죄의 근원은 욕심이며, 따라서 죄는 욕심 그 자체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한 열매를 따먹었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으로 대변되는 욕심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든 작든 다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 안에서만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아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비워서 행복하다면, 그 사람이 비록 거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그 자세만큼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무쪼록 새 해에는 우리 모두가 우리를 크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마음을 비우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 나가므로 그 마음과 삶 속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행복감이 튼튼히 자리 잡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