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부산총회는 종교다원주의 온상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제10차 총회(이하 부산총회)가 개최되는 부산에서 필자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통곡하고 계셨다. 피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WCC가 인류 구원의 복음을 마르크스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으로 대체시키고, 십자가에 달린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 지킴이, 환경 운동 전도사, 인민 해방 운동가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부산총회는 인류가 학수고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로막고 만인과 만유의 진정한 회복을 방해했다. WCC 부산총회는 거대한 영적 쓰나미였다.
WCC 한국준비위원회는 감사하게도 필자에게 부산총회 참가 기회를 주었다. 부산총회는 화려했다. 다양한 기독교 유형들을 포용하고 일치시키는 모습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생명, 평화, 인권, 인간화, 연대투쟁, 평등, 가난과 질병 퇴치 등의 주제에 대한 통찰은 탁월했다. WCC 에큐메니칼 운동은 21세기 기독교 운동의 큰 물줄기이다. 그러나 필자는 화려하고 거창한 부산총회 안에 교회의 생명력을 빼앗는 독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부산총회에서 확인한 것은 필자의 WCC 신학에 대한 연구와 지적의 정확성이다. WCC는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대화주의, 사회구원지상주의, 용공주의, 로마가톨릭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가시적 교회일치주의, 성경불신주의를 변함없이 지향, 표방하고 있었다. ‘개종전도금지주의’를 확대하여 타종교에 적용했다.
2. 부산총회에서 WCC는 복음적으로 회귀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산총회를 계기로 이 단체가 복음적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복음주의자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WCC에 가담하여 신학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자”고 말하던 신학자들의 오판은 교회의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하는 피해를 안겨주었다. 이 오판은 신학 패러다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WCC와 역사적 기독교는 충돌한다. 서로의 다름을 수용할 수 없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은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다. 패러다임은 특성상 중간을 배제한다. 타협과 절충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대방 패러다임의 전환과 이동만을 요구한다.
3. 부산총회는 WCC가 자신의 신학을 복음화 하는 시도를 허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WCC 총회 참관자들은 이 단체의 신학적 기조를 바꾸는 발언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중요한 신학문서는 WCC 직원들과 전임(專任) 신학자들이 미리 완성하여 해당 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종결지으며 총회장에서 이를 선포한다. 부산총회가 선포한 새 선교-전도 선언서는 십자가 복음은 배제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담고 있다. 에큐메니칼 대화와 토론을 거쳐 수정되리라고 기대했으나 의견수렴이나 논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선포되었다. 문서 작성과 보완 발언은 회원 교회가 파송한 소수의 총대들(delegates)만 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가 WCC 대표자로 파송 받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파송을 받아 발언은 해도 대세(大勢)에 역행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4. WCC는 총회의 모든 회무와 발표 내용을 미리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진행했다. 정현경 박사가 WCC 제7차 총회(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연출한 종교혼합주의 초혼제(招魂祭) 푸닥거리 한마당이 이 단체의 신학적 흐름을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 준 계획된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WCC는 지금까지도 초혼제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해명하지 않았다. 부산총회에서도 종교혼합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민속춤과 그 몸짓은 대부분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부산총회 마당에는 미신적인 토템 신앙을 담은 아프리카의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예배 시간에 국악 연주자들이 사용한 징의 머리에는 용머리가 붙어 있고, 그 음색은 억울한 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제(鎭魂祭)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은 WCC의 다양성 포용, 혼합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일치정신의 상징들이었다. 예배 순서에 등장한 이교적 요소들을 역겹게 느끼며 불평하는 외국인 참가자들도 있었다.
5. 부산총회는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 표현들의 어울림 마당인 동시에 기독교를 다른 여러 종교들과 동가(同價), 동격(同格) 선상에 두고 접근한 행사였다. WCC는 주제 강연 마당에 유태교 랍비, 이슬람 사제, 불교 승려를 연사로 내세웠다. 타 종교 지도자들을 앞세움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를 제공할 목적이 아니었다. WCC는 기독교 진리의 배타적 특성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가 낳은 상대주의 진리관에 따라 기독교를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무리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다고 본다. 불교, 이슬람, 힌두교 안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익명의 기독인들’이 있다고 선언한다. 필자와 대화를 나눈 독일, 남아공, 네덜란드 교회의 총대들은 “하나님은 전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한다. 기독교인만 사랑하는 게 아니다”고 역설했다.
6. 부산총회는 단 한 차례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WCC는 유명한 ‘전통론’ 또는 ‘대문자 T이론’을 담은 몬트리올보고서(1963)를 천명하면서 ‘오직 성경’ 원리를 버렸다. 그 후 성경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제시하는 핵심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은 배제하고 인권, 정의, 평화, 공해, 환경, 빈곤 극복, 자본주의 타도 등 사회복음지상주의 활동에 매진한다.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전도의 알파와 오메가로 여긴다. 폐회식 인사말 시간에 “오직 예수 구원자”라고 말한 김삼환 목사(WCC 부산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은 부산총회의 신학적 주제와 불일치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의식한 자기변명 같은 독백이었다.
7. 부산총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또는 순종의 결핍이다. 죄 문제 해결의 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선교-전도의 핵심은 구원 소식, 죄 사함, 영생의 복음이다. 그런데도 부산총회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인민해방과 만유의 생명지킴이 활동을 선교와 전도의 목표로 삼았다. 여러 가지 유형의 억압,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을 구원으로, 그러한 활동 소식을 복음이라 소개했다. 죄를 자본주의적 탐욕, 생태학적인 파괴, 경제적인 모순, 사회적인 결함과 차별과 억압으로 규정했다.
8. 부산총회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도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중심 진리인 하늘에서 내려온 떡―빵과 그것을 먹는 자들에 주어지는 새 생명을 말하지 않았다.
9. 부산총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화가 유지되는 세속적인 이상 사회로 환원시켰다. 복음을 세속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동일시했다. 교회의 존재의의와 정체성을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에서 찾았다. 인간화와 혁명투쟁을 하나님 나라 확장 수단으로 여겼다. 교회의 사회적 문화적 책임, 피조물의 생명과 생명 충만 활동을 자극하는데만 관심을 가졌다. 아이는 낳지 않고 노인복지에만 전력투구하는 격이었다. WCC가 강조해 온 '전 복음'(holistic gospel)은 입술에 발린 말임을 보여주었다.
10. 부산총회는 하나님의 세계 돌봄 활동과 구원 역사(役事)를 구분하지 않았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자연적 생명을 부여하고 돌보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과 성령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영적인 이스라엘 신앙고백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 일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부산총회는 이 엄연한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기독교의 독특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11. 부산총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zoe)을 자연적, 생물학적 생명―목숨(bios)으로 환원시켰다. WCC가 말하는 생명과 생명 충만은 아프리카의 부족 종교도 공감하고 한국의 박수무당도 환영할 수 있다. 인도의 범신론적 종교 사제도 받아들 만한 개념이며 뉴에이지 운동의 구루(guru)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신적 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도 호감을 가질 수 있다. 부산총회가 제시한 성령은 타종교인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힘, 에네르기, 정령(精靈)과 구분되지 않는다. WCC의 ‘생명’과 '성령' 개념은 종교통합을 향해 달리는 고속도로이다.
12. 부산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웃 종교들과 공동의 증언에 근거한 쌍방통행의 대화를 강조했다. 만인보편구원주의에 근거하여 전도를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두지 않고(without setting limits to the saving grace of God)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하는 선교활동이다”고 규정했다. ‘중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탈기독교적인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두지 않고”라는 문구는 WCC의 공식 문서들에 여러 번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 선언이다. WCC는 전도를 모든 유형의 문화―종교의 가치를 존중하고, 피선교지에 이미 먼저 가서 선교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모든 종교들에 기독교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한다.
13. 부산총회는 인류와 만유를 배반했다. 부정의와 억눌림과 탐욕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자유하게 하는 활동은 언제나 어디서나 중요하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생명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곧 선교와 전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다. 피조물들의 회복의 첫걸음은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을 가로막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이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다”(창 3:18). 인간에게 진실, 인애, 하나님 지식이 없고, 오직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하며, 포악하며, 살인이 계속되자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해졌다”(호 4:1-3). 부산총회는 교회의 선교와 전도 사명을 왜곡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기회를 가로막았고 결과적으로 인류와 만물의 온전한 회복을 방해했다.
14. 부산총회는 국제연합(UN)과 비정부기구(NGO)가 수행해야 할 과제만을 다룬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회합이라 말하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말씀했다. 이 명령은 인권, 인간화, 해방투쟁, 신토불이 유형의 생명, 생명 충만 활동을 하라고 하는 부름이 아니다. 정치가, 경제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기타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수 있는 과제 수행이 아니다. WCC가 전력투구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15. 부산총회는 WCC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표준으로 삼지 않음을 다시 일깨웠다. WCC 사무총장 울라프 트베이트 목사는 “WCC는 동성애에 대하여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경이 동성애를 명백하게 죄로 규정하는 것과 상반된다. 폐회예배 설교자 남아공 성공회 사제 미카엘 랩스리는 동성애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꿈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모든 위대한 종교들의 지도자들이 나와 똑 같은 사과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서 “우리는 성경이 끝나나는 데서 하나님의 계시가 끝난다고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에로 계속 인도해 준다고 믿는가” 하고 ‘탄식’했다. 성경을 따르지 말고 의견수렴을 거쳐 동성애를 죄 아니라고 선언해야 한다는 뜻이다.
16. 부산총회는 교회가 WCC 신학을 추종하면 생명력을 상실하고 퇴락하는 현실을 사실상 밝혔다. 부산총회 마당의 가장 인상적인 것은 “WCC가 교회를 죽인다”(WCC KILLS CHURCH)라는 피켓이었다. 부산총회가 선포한 새 선교-전도 선언서는 “지형 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를 부제로 달았다. ‘지형 변화’(changing landscape)란 기독교의 요람이었던 유럽, 북미, 대양주 지역의 주류 교회들이 극도로 쇠락하고,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가 기독교인 인구의 중심축이 되었음을 뜻한다. 위 지역 교회들의 극심한 퇴락을 가져온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 진리관, 자유주의 신학에 뿌리를 둔 WCC 에큐메니칼 운동 보다 더 중요한 까닭은 없다. ‘지형변화’는 WCC 추종하던 주류 교회들의 극심한 퇴락과 조종 소리를 반영한다.
17. 부산총회는 교회의 퇴락을 초래한 원인을 규명하지 않았다. ‘지형 변화’의 까닭 규명과 대안 제시는 WCC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선교-전도 과제이다. WCC가 그 까닭을 밝히자면 스스로 불편한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포용주의·다원주의·신앙무차별주의 그리고 상대주의 진리관에 기초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독성을지적하고, 반세기 동안 교회를 희생시키면서 심혈을 기울여 온 ‘하나님의 선교’를 쓰레기로 간주하고, WCC를 추종하면 교회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8. 부산총회가 채택한 한반대륙의 평화 주제문서는 WCC의 유서깊은 용공주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련 인사들이 이 주제 문안의 초안을 만들고, 에큐메니칼 대화를 주도했다. 필자는 3차례 이 대화에 가담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담아야 한다”고 말하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토론자는 “북한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답했다. “핵무기 포기를 요구하라”고 하자,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답했다. 북한이 거듭되는 한미군사훈련에 대한 자기방어기재(self-defense mechanism)로 핵무기를 가졌으므로 그것의 소유는 정당하다는 뜻이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마 26:52, 계 13:10 참고)는 문구라도 넣으라고 하자, 그 말은 북한이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을 향하여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발표된 한반대륙 평화 문서 내용은 친북·종북 차원을 넘어선다. 북한에 대한 경제-금융제재 해제, 한반대륙 외세개입과 군사훈련 중단 요청, 그리고 한반대륙 사안을 훨씬 넘어서는 내용을 담았다. “전 세계가 군비 축소 과정에 참여하도록 요청하자,”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 비핵화를 위한 활동을 하자”는 따위의 선언이다.
19. 부산총회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면서도 그것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패한 사회주의 이념을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표방했다. 부산총회는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 역대 총회 가운데서 참가국 수, 인원, 환대 차원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대했다. WCC가 사회주의적 압력에 저항하는 자본주의 요람에서 가난, 빈곤, 해방, 정의, 평화, 만물의 생명과 생명 충만을 논의함은 아이러니였다. 총대들은 호화로운 호텔에 묵었고 값비싼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하루에 수백 불을 지불하는 호사스런 곳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1불 이하의 돈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권, 빈곤, 평등, 연대투쟁 따위를 논하는 격이 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WCC가 한국을 제10차 총회 장소로 결정한 까닭은 돈 때문이었다.
20. 부산총회 회의장 바깥의 WCC 반대자들은 이 총회가 세계기독교의 올림픽이 아니며, 한국교회 전체가 환영하는 행사가 아님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에 생명력을 가진 그루터기, 남은 자들, 진리 지킴이들이 있음을 알렸다. WCC에 참석하던 어느 영국인은 반대자들과 대화를 한 뒤에 ‘예수 유일의 구원자’를 외치는 반대자들의 규탄 행사에 적극 가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의자들은 WCC의 복음화에 이바지했다. 동성애자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공식 회의 시간에 그리스정교회가 파송한 총대 루크(Louk) 박사는 WCC를 반대하는 자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총회장 밖에는 ‘WCC가 동성애를 찬성한다,’ ‘WCC가 교회를 죽인다(WCC Kills Church)’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일치 성명서에 반대 주장들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부 총대들은 동성애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대자들이 WCC 총회에 영향을 준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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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자신과 다른 특징을 가진 기독인 형제자매를 용납해야하는 신앙고백공동체이다. ‘진리 안의 일치’를 조건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언제나 바람직하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 있는 이단보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이 더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다름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다름이 있다. WCC와 역사적 기독교의 관계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단은 작은 틈만 열어주어도 막무가내로 침략하여 집안을 분탕질한다. ‘이단’은 중심 교리, 핵심 가르침, 중추적 고백이 다른 집단을 일컫는 용어이다. WCC는 자유주의 신학에 납치되어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배제, 왜곡하고, 선교 또는 전도의 주객을 전도시켜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배신했다. 초기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오늘날의 WCC를 검토하면 단연코 ‘이단’ 이라 선언하고 추종자들에게 저주(anathema)를 선언할 것이다.
지능적인 이단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오인하게 한다. 자신이 적이 아니라고 믿게 한다. 적진에 있는 적의 장수보다 아군의 진지에서 적과 내통하는 졸병 한 명이 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성문을 열어주면 전쟁은 패배로 끝난다. 초대교회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막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라고 했다. 장로 요한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10),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라”(요이 1:11)고 했다.
부산총회는 ‘신종 기독교’ 출범의 청신호였다. 정초 한국교회의 화두가 된 ‘4대 신학 조항’을 거부하는 ‘기독교’가 한국에서 횡행하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종교다원주의-종교혼합주의, 용공주의-동성애-인본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를 지향하고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말씀이라는 믿지 않는 ‘기독교’가 고속 행진을 시작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에 있는 교회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 작용을 하면서 더불어 존재한다. 이 마당에, 예장 통합 총회장은 부산총회 직후 “교단의 정책과 사업에 WCC 부산총회의 에큐메니칼 정신과 생명, 정의, 평화의 주제를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영역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하면 영적 영양소 결핍과 핵 방사능 탓으로 교회의 퇴락과 죽음의 속도는 빨라진다.
성경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 구원 유일의 진리를 전파하고, 교회의 복음 변증적 사명을 감당하는 진리의 용사들이 기지개를 켜고 사자처럼 일어나면 WCC의 독성을 이겨낼 수 있다. 재래식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불길에 사로잡히는 은혜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교회의 사활(死活)이 달린 신학충돌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소수 신학자들―별들의 전쟁이다.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학자, 목회자, 기독론과 구원론 중심의 단순한 기독교 운동, 신학운동, 신학교운동이 절실히 요청된다. “오소서 창조자 성령이여,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2013. 12. 6.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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