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대체적으로 'rule' , 'standard' , 'principle' 등이 원칙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규칙'을 뜻하는 'rule'은 "똑바로 가다"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회초리(rod)를 뜻하는 라틴어 ‘rugula’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똑 바로 가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기준(基準)' 혹은 '표준(標準)'을 뜻하는 standard'는 '군기(軍旗)'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중세시대에 병사들이 전투를 할 때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꼿꼿하게 박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결전을 치르도록 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 군기는 계속해서 꼿꼿하게 박혀있을 것이고, 패배하면 뽑히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이 군기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standard'는 바로 이 '군기(軍旗)'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전쟁터의 용사들이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버티는 자세에 적용되어, "최후의 저항, 반항, 확고한 입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standard'는 결국 사회의 최후의 버팀목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기준'이 무너지게 되면 전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준'과 '원칙'을 뜻하는 'principle'의 어원은 라틴어 'principium'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의미는 '시작' 또는 '근원'이다. 법'을 뜻하는 'law'의 어원도 'origin'으로서 '근원'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규칙'을 말하는 'rule'의 어원은 "똑바로 가다"에서 비롯되었다. '시작' 또는 '근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기준'이나 '원칙'은 "똑바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
똑바로 가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 숱한 혼란과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근본 요인은 바로 '기본'과 '원칙'이 충실히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원칙'과 '기준'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결코 존립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칙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원칙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고,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수1:7-9).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똑바로 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원칙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해 주시므로 결국은 평탄함과 형통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바로 가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게 되면, 다시 말해서 원칙에서 벗어나게 되면 회초리를 맞게 된다.
또 요한계시록 19장 11-14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우리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여기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충신과 진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칙으로 삼아야 할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 원칙의 특성은 "충신과 진실"이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을 보면 "충신과 진실"이 "Faithful and True"로 번역되어 있다.
'충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Faithful'은 믿을 수 있는 사람, 즉 언제 어느 때나 신뢰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사람, 다른 말로는 신의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26장 2절은 "너희는 (하나님의 구원을 성벽으로 삼은)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에게 열린다는 것이다.
신의는 하나님께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조차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신의를 지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신의는 사회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우리 민법은 제2조에서 신의성실을 법령으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신의, 즉 믿음과 의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굳게 지켜져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서 인격과 인간관계의 기초이며, 우리 사회와 단체를 건강하게 지탱시켜 주는 버팀목이다. 따라서 신의가 무너지면 그 사회와 단체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고 결국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옛말에 "군자유우의, 소인유우이(君子喩迂義, 小人喩迂利)"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의(義)에 즐거워하고, 소인은 이(利)에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는 '공(公)'과 '사(私)' , '의(義)'와 '이(利)'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공(公)'과 '의(義)'를 선택할 것이냐? '사(私)'와 '이(利)를 선택할 것이냐? 인간은 이 두 사이에서 갈등하고 투쟁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특성을 규정한다. '사(私)' 때문에 '공(公)'을 저버리는 사람, '이(利)' 때문에 '의(義)'를 저버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말이다.
True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진실을 의미한다. 진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경은 마귀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들을 향해 아주 단호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정말 섬뜩하고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진실이시오,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진실을 말해야 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며, 진실 편에 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이익과 정치문제에 집착하여 쉽게 거짓을 지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한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역시 자기 이익과 정치문제에 집착하여 진실 규명의 노력을 너무나 쉽게 일축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그러나 마귀는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하면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고 했다.
하와는 "정녕 죽으리라"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두 말 사이에서, 즉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적어도 치열한 고민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하와는 별로 고민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럴듯한가를 보지 말고 진실한가를 보아야 한다. 그럴듯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항상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단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다. 그리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목적한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원칙이라는 말은 '시작' 또는 '근원' 그리고 "똑바로 가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기준'이나 '원칙'은 "똑바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의와 진실에 바탕을 두고 똑바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 원칙이 과정을 이끌고,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원칙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과정을 혼란스럽게 하며, 일시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선악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역사에 있어서 악(惡)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결국 망쇠(亡衰)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원칙이 분명한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사방으로 우겨 싸이고, 답답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과 모함을 받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무원칙 자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모든 과정을 주도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원칙에 입각하여 사리를 판단하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항상 똑 바로 갈 수만은 없다. 흔들릴 때도 있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으며, 궤도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항상 스스로 돌이키고(눅15:17), 원칙으로 되돌아와서(눅15:20) 다시 시작하는 자세만은 결코 잃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변명은 도움이 안 된다(창3:11-19; 삼상15:10-23). 하지만 돌이킴에는 은혜가 뒤따른다(눅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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