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 theology)은 신앙의 대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라는 낱말은 데오스(θεό;ς; : theos →신)에 로고스 (λό;γος; : logos, →학문, 말)가 결합된 단어이다. 원칙적으로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종교적 초월자로서의 신 개념이 존재하는 모든 종교 - 예를 들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시크교, 바하이교 등 - 에서 다루는 신에 관한 학문을 신학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특별한 수식어 없이 신학이라는 낱말을 쓸 때는 대개 기독교 신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그 진리를 거듭 재해석하고자 했던 기독교 공동체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3세기부터 학문으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하여, 중세시대에 유럽인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신과 관련된 일체 문제를 연구하면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근현대에 이르러 더 세분화 되고 있다. 교파에 따라 개신교 신학, 가톨릭 신학, 정교회 신학 등으로 나뉠 수 있으며, 개신교 신학 안에서도 개혁주의 신학, 오순절 신학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각 교파의 이름을 붙여 ‘00교 신학’이란 표현으로 세분화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는 신학에 대하여 ‘신이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맺고 있는 관계와 신을 연구하는 학문. 대개는 기독교 교리 및 신앙생활의 윤리를 연구하는 학문을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신학의 연구대상은 이성의 영역 안에서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궁극적인 존재, 절대자, 초월자‘ 등으로 일컬어지는 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시지만, 그 탐구의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의 학문적 연구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학은 인간의 시도이며, 시대상황과 역사성에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학문 일반의 한 분야로서의 신학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신학의 갈등이 있다. 이른바 신앙과 학문의 충돌이다. 이는 믿음과 이성의 충돌이기도 하다. 믿음에 기초한 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신자의 신앙에 빛을 비추어주는 계시의 해석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학문에 기초한 신학은 종교적 측면에서 학자의 학문적인 열정과 호기심을 채우고 연구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신학을 연구할 때, 대전제가 되어야 할 기초는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를 기반으로 한다(고전2:7-14). 계시는 믿음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지, 이성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요1:1-5). 믿음이란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분명하게 이해가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창조주는 피조물에 의해 분석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란 절대적 존재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서만 이해 할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신학을 연구할 때는 반드시 학문적 관점이 아닌 신앙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정도(正道)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간과 세상 가운데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이 아닌 종교적으로 구상된 추상적인 신이 되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종교적 사상이 뛰어난 인간의 창작물이 되고 만다. 이른바 신화화(神話化, mythologize)로 이어지는 것이다.
혹자는 그런 편협한 시각으로는 신학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신학의 발전이란 신자의 신앙의 폭과 질을 넓혀주는 것이어야 한다. 결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분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면 그것은 결국 인본주의의 극치로 치닫게 되고, 철학적 사변과 다원주의적 사상에 종속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실제로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성의 역할이 강조 되었으며, 이를 이어받은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리의 판단 기준은 ‘합리적인 이성’이라고 믿었으며 신학의 주제도 이성적이지 않으면 거부되기 시작했다. 결국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그 당시 독일의 철학자이자 계몽주의 저술가로서 ‘인간 이성은 계시에 바탕을 둔 종교보다도 더 확실한 종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신론(理神論, 자연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이며, 자연종교란 계시가 아닌 이성을 사용하여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지식체계를 인정하는 것이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해진 「라이마루스」(Reimarus, Hermann Samuel, 1694~1768)는 〈홍해를 통한 이스라엘의 여정〉(The Passage of the Israelites Through the Red Sea)이라는 단편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적어도 9일은 걸리므로 홍해사건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고, 〈부활에 대한 서술〉(On the Resurrection Narrative)이라는 단편에서는 공관복음서의 부활 사건이 서로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부활 역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독일의 「불트만」(Bultmann, Rudolf, 1884~1976)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언제나 학문적 신학의 길을 따르고자 했던 독일의 대표적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신약성경의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ize)를 제창했다. 그는 〈공관복음서 전승사〉(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라는 책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며, 초기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작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의 저자들이 여러 교회에 유포되고 있던 단편적인 구전들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그 역사적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고 했다. 단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그를 메시야로 불렀으며, 그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내용을 복음서에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 광야의 기사(奇事), 변화산 사건, 이적(異蹟), 부활 등 모든 기사(奇事)들이 신화로 취급받게 되었다. 불트만은 복음서들의 신화적 성격을 주장한 후에, 그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비신화화 작업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다룰 때에, 신화적인 설화에 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처럼 신학을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불트만의 경우처럼, 인간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인간의 자기이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신의 존재가 인간존재의 분석에 의해서 이해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종교성이 뛰어난 인간의 창작물로 전락하게 되고, 계시의 주체가 뒤바꾸어지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자기도취 내지는 철학적 사변에 불과해 지는 것이다. 이것은 계시의 주체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이성에 의해 이해 불가능한 사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공통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성의 한계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 실존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당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고 계시해 주셨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심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서 분석될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분석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일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라는 분명한 신앙적 인식하에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토대로 기독교의 진리를 인간상황에 선포하고 변증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에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믿음이다. 초월자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 기초하여 신학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를 인간상황에 올바르게 선포하고 변증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