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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안기호 목사-비전(Vision)2011-03-24 10:21
작성자 Level 8

‘Vision’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는) 상상력, 선견(先見), 통찰력, 환상, 꿈’ 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다. 성경은 이 ‘비전’(Vis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참조 욜2:28)는 말씀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목적 중에 하나는 바로 비전을 갖게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닌,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비전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비전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사적 요소라는 점에서 비전의 보유 여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선택적 사항이 아닌 필수적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이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로 드는 성구 중에 하나가 잠29:18의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학자들 가운데는 여기에 나오는 ‘묵시’라는 단어를 ‘비전’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묵시’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그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묵시’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상상력, 꿈, 환상’ 등의 뜻을 지닌 비전으로 해석하는 것은 두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비교해 볼 때, 분명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비전의 속성에 비추어보면 ‘묵시’(하존)라는 단어만큼 성경적 비전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해 주는 용어도 없다. 여기에서 내가 굳이 ‘성경적 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세속적 비전’과 대비(對比)한다는 의도에서이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비그리스도인의 비전과 그 근본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비전의 출처와 목적에서 본질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는 것으로써 ‘갖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그 비전은 곧 사명이 된다. 반면에 세속적 비전의 출처는 인간이며, 그 목적 역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질적 양적으로 그 편의를 도모하고 수준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비전과 하나님의 비전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요셉의 꿈을 살펴보자. 성경은 요셉이 꿈을 갖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37:5,9). 이 말은 그가 꿈을 꾸고 나서 꿈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꿈을 꾼 것은 임의적으로 자기가 원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그 꿈이 바로 그의 꿈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요셉이 훗날 아버지 야곱의 임종 이후 불안해하던 그의 형들에게 한 말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45:5,7). 이 말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으로서 그 꿈은 곧 사명이 되었고, 그 꿈과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주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린 것밖에 없다.

모세는 어떤가? 출3:10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아가던 모세에게 나타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모세의 비전이요 사명이 되었다.
 
느헤미야도 자신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겠다는 비전을 갖게 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 새’(느2:1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위한 비전을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넣어주셨고, 느헤미아는 그 비전을 사명으로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막16:15). 이 말씀대로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의 명령을 자신들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비전은 그들이 생명을 다해 이루어야 할 필생의 사명이 되었으며, 결국 그 비전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바쳤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며, 그 비전을 주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으로서 비전은 곧 사명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성경적인 비전의 사람은 그 비전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즉 사명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주도해 나가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뿐이다.

비전을 ‘상상력, 꿈, 환상’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계획, 목표, 소망 등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포괄하면 비전은 일종의 ‘바램’, 즉 소원이다. 그리스도인의 ‘바램’은 반드시 기도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소원(계획, 목표)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라는 신앙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내가 갖는 비전, 즉 세속적 비전은 오히려 하나님의 비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비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그 일행과 함께 거듭해서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았으나 성령께서 계속해서 그들의 길을 막으셨다. 복음을 거대한 아시아 대륙에 전하겠다는 비전은 윤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바울의 비전을 수정해 주셨고, 바울은 하나님의 비전에 순종했다.

성경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 이러라'(행16:6-10).

목표, 계획, 꿈 등은 필요하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분명히 성경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비전이라도 하나님의 비전과 상충(相沖)될 때는 지체 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비전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임의로 비전을 정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을 위시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임의로 세속적 차원의 비전(혹은 자신의 생각과 뜻에 기초한 비전)을 정하고, 그것을 신앙적인 것으로 각색한 후에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 비전과 꿈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비전을 갖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비전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내 자신을 바치겠다는 사명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살피고 구하는 자세요,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결단이다. 그 결단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비전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어떤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비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비전인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