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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사람-“80 넘어 만든 성가곡은 치유의 선물”2013-04-16 08:19
작성자 Leve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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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한국 음악계 거목에 잇따라 찾아온 좌절과 상처3년전 총신 서요한 교수와 만남은 커다란 울림신학자의 시는 찬송가 되어 감사와 평안이 되다.

거장의 기품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음악에서부터 문학, 미술에 이르기까지 술술 흘러나오는 해박한 지식의 깊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노신사의 눈물 어린 신앙고백에는 살아온 여생의 회한이 녹아있었다. 대한민국 가곡의 거목,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85)을 만났다.
중절모와 바바리로 한껏 멋을 내고 등장한 최영섭 선생은 먼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최영섭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은 아름다운 섬 강화도의 마니산 자락. 자연과 벗 삼아 보낸 기억이 훗날 산과 강, 바다를 노래한 다수의 작품에 투영됐다는 그가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추억꺼리를 되새겼다. 6살 때 시골교회에서 보낸 성탄절 이야기였다.
“당시가 일제시대였는데 온수리 시골교회에서 작은 촛불을 켜놓고 찬양하던 성탄풍경이 아직도 가슴 속에 아름답게 남아있어요. 그 후 화려했던 수많은 성탄풍경보다 그때가 더욱 그립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친구들과 무대에서 불렀던 ‘그 어린 주 예수’을 율동과 함께 재현해 보이는 노년의 작곡가에게서 유년의 향수가 물씬 느껴졌다.

최영섭 선생이 본격적으로 작곡공부를 시작한 때는 경복고등중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피아노에 관심을 두었으나, 짜리몽땅한 손가락이 걸림돌이었다. 피아노를 그만두라고 권하는 선배의 조언은 사춘기 소년에게 커다란 상처였지만, 열정 가득한 어린 음악가는 곧바로 작곡공부에 매진했다. 수소문해 만난 임동혁 교수(이화여대)의 문하생이 되었고, 하루에 3시간만 수면을 취하며 학교공부와 작곡공부를 병행했다. 밤잠을 거르며 써내려간 노력의 결과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나타났다. 1949년 6월 중학생 신분(중학 6학년 때)으로는 이례적으로 작곡발표회를 연 것이다. 작곡발표회장을 방문한 고 나운영 작곡가는 “앞으로 가장 촉망 받을 수 있는 작곡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서울신문에 기고했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나, 고 나운영 작곡가의 믿음은 빗나가지 않았다. 서울대 작곡가에 들어간 청년 음악가는 훗날 350여곡의 가곡을 포함해 피아노독주곡, 칸타타, 실내악곡 등 500여곡의 작품을 빚어낸 거장으로 우뚝 섰다.
방송계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동아방송, TBC동양방송, KBS, MBC 등을 두루 거치며 명곡해설자로 무려 35년 동안 활동했다. 여기에 애작 ‘그리운 금강산’, ‘추억’, ‘낙엽을 밟으며’가 빅히트를 치면서 부와 명예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러나 탄탄대로 같던 그의 삶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 사업 실패 등으로 엮여 좌절과 상처에 신음했고, 어렵게 모은 전 재산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세파에 시달릴 때 말도 못할 정도로 비관했습니다. 3년 동안 단 1곡도 작곡을 못하고, 정말 미친 사람 같았지요. 정동교회와 내리교회에서 지휘를 했던 제가 하나님의 마음까지 괴롭게 한거죠”
인생의 쓴잔을 마시고 내리막길로 내달릴 무렵, 어디선가 찾아온 손길이 그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최영섭 선생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2010년 2월, 마지막 겨울에 만난 총신대 서요한 교수가 그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지인을 통해 마주한 두 사람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 교수의 시 한편을 건네받고 최영섭 선생은 서둘러 귀가했다. ‘주홍글씨’,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시를 펼쳐 본 순간, 한국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은 통곡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서 교수의 ‘주홍글씨’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그 시를 보면서 기독교인을 자처했던 제가 세상살이에 시달리며 비기독교인만도 못할 정도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서 교수와의 만남은 최영섭 선생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황혼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산수를 넘겨 성가곡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 서 교수의 작시에 맞춰 ‘상한 갈대’, ‘마라나타’, ‘영광의 주 하나님’, 그리고 ‘주홍글씨’ 등의 성가곡을 써내려나갔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작곡을 했어요. 내리는 눈물에 오선지가 흥건히 젖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그렇게 만든 12곡의 성가곡과 15곡의 찬송가는 늘그막에 얻은 자식 마냥 소중했다. 지난해 12월에 출간한 최영섭 가곡전집 4집에 수록하기도 했다. 모두 최영섭 작곡, 서요한 작사로 채워졌다.
한국 음악계 원로와 신학교수의 공동작업은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았지만, 최영섭 선생은 서 교수의 작시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문필생활을 한 시인의 시에서도 간혹 인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 교수 작품은 꾸밈이 없어요. 느낀 그대로 작시를 해서 작곡하는데도 막힘이 없습니다. 성가곡도 서정가곡도 서 교수의 시를 읽으면 동감이 되고 멜로디가 바로 나옵니다”
성가곡 외에도 서정가곡 12곡도 공동 작업했다. 최영섭 선생은 그 중 ‘설악산아’를 백미라고 칭한다. 애착이 상당해 소프라노 조수미 씨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리운 금강산’에서 애절함이 나온다면 ‘설악산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설악산아’는 오케스트라만 잘 어우러진다면 ‘그리운 금강산’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곡입니다. 앞으로 저의 콘서트의 피날레는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아’가 장식할 예정입니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하는 최영섭 선생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분명 그 미소의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온전히 삶의 여부는 하나님과 함께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그는 고백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귀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성가를 작곡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나의 가슴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작곡가 최영섭, 대한민국 가곡의 거장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어린 주 예수‘를 불렀던 처음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같은 걸음으로 동행하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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