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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선교지에서 온 편지-네팔 복음화 사역에 오늘도 힘을...2015-12-07 10:28
작성자 Leve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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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이요”(마 5:9)


말씀에는 분명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들 됨이 간단치 않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아들 됨은 먼저 화평케 하는 자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화평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며 기여하는가, 살벌하기 만한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말이다. 내가 먼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타인이야 죽든 말든 앞 만보고 내달리게 되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타성에서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 나라와 나라사이에 끼어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몫을 얼마나 할 수 있단 말인가,
화평이란 한마디로, 세상사는 동안 서로 제발 싸우지들 말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묵시적 바람이자 명령이며 구원받은 자가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다.
그럼에도, 삶의 현장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적자생존이라는 필연적 숙제를 안아야하고 한 가지씩 인지되어가는 모든 가시적 상황은 배움을 통해 알고 생각하며 만들어 가는 과정, 과정이며 동시에 주어지는 각양 문제와의 갈등, 즉 자아와의 싸움을 면할 길이 없다. 말하자면 세상과 나의 부닥침이란 곧 이를 수용하고 이해,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생존의 적합 여부가 가늠되는 실존의 현장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나란 존재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다양한 문제로부터의 갈등을 인내하며 극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진전을 가져 올 수 없는 매일의 삶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을 이기고 다스림이 쉬운 듯하면서도 실상은 무엇보다 어려운 점에 속함이다. 왜냐하면 희비애락이 교차하는 매일의 삶이란 마치 가파른 파도를 타고 넘듯 균형감각을 잃고 자칫 쓰러지기가 일수며 또한 제마다 다르게 타고난 천품, 기질은 경우에 따라서 환경을 극복하는 장애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세속적 습관으로 알게 모르게 젖어버린 타락한 성품이라면 남다른 자기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제3의 눈(객관적)으로 스스로를 관조하며 컨트롤함으로서 자신과의 조화로운 타협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과의 화평이란, 일단의 믿음, 곧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 신념화한 믿음일지라도 이에 대한 요동치 않는 믿음의 의지가 십분 발휘, 견지될 때만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그러나 이해득실을 따지기 바쁜 세상살이에서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관계란 결코 쉽지 않다.
필요에 의해 부득이 지속되는 만남, 그래서 겉만 포장된 화평이란 진정한 화평이 아니며 그것은 불시에도 이해관계가 무너지면 삽시간에 사라진다. 일차적인 나의 소욕이나 주장, 일단의 번거로운 심리적 걸림돌이 정리되었다면 이후에는 피치못할 타인들과의 만남이며 이 역시도 불협화음 속에서 이룰 수 있는 대화나 교제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날그날의 심기여부에 따라서도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간, 나라와 나라사이의 평화로운 교제 서로간의 진실과 믿음이 교차되는 평강이란 과연 어느 선까지 가능할까? 정녕 시종일관 평정한 교제를 통하여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게 된다면 실로 그 품격이란 약속의 말씀을 준행, 성취한 신령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사는 사회에서 상호간의 화평을 도모하고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한 도무지 불가능하다. 돈, 권력, 등의 가시적인 힘이 앞서서 지배하는 인간사회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힘에 더욱 편승함으로 서로의 틈새를 메워가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평화를 공유하기가 힘든 현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값없이 주신 십자가의 공로 없이도,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도 사람간의 격의 없는 진정한 화평을 도모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요동치 않는 평화로운 천국이 되지 않겠는가? 돈과 물질의 유혹, 그 위에 조금의 틈만 생겨도 이를 노려 파고드는 마귀의 영적 부축임과 도전, 혈과 육을 입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엔 불가항력적이며 다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심을 믿고 약속의 말씀을 준행함으로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이란 말씀이 뜻하는바 의미를 먼저 깨닫고 이에 철저히 순종한다면 이미 화평의 열매는 믿음과 동시에 안팎으로 주어 졌겠지만, 세속의 냉혹한 생존경쟁의 무대 위에서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를 벗어 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의 속성을 입고 있는 한, 주님께서 지신 화평과 구원의 십자가를 뻬 놓고 인간 스스로가 이룰수 있는 화평의 여지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로 전략적 차원의 발상에서 나온 화평이란 때를 따라 처방하는 임시방편적 수단과 같아서 결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것, 곧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화평은 믿음, 소망, 사랑과 아울러 수반하는 십자가를 의미하며 십자가란 바로 자기 희생이다. 이와같이 화평을 바라는 자라면 누구라도 믿음과 인내로 일관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지막까지 붙들어야만 한다.
그럼으로 화평은 나를 위함은 물론 너와 나를 동시에 위함이다. 곧 화평을 위한 십자가는 한낱 고통으로 끝남이 아닌, 주님의 부활처럼 감사와 기쁨이 동시에 주어지는, 종래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며 천국의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유의 십자가 일지라도 차라리 그것은 감사와 화목의 제목이지 저주의 결과는 결코 아니며 최후까지 인내하고 수고하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성도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자리가 될것이다.
십자가는 인력으로 감당되는 것이 또한 아니다. 인력에는 반드시 그 한계가 있지만 믿음으로 인한 신령한 의지는 여하한 한계상황이라도 격파한다. 세상의 어떤 보상이 아닌 천국의 소망과 상급을 바라보는 인내와 희생은 곧 마르지 않는 은혜의 깊은 샘과 연결되어 마침내 성화된 영혼이 영화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영화한 영혼에겐 죽음이란 잠시잠간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언덕진 경계와 같다. 그리고 그 너머엔 활짝 펼쳐진 대 초원이 기다리듯 영원한, 영생의 파라다이스가 기다린다.
요즘 나라 안팎의 소식은 정녕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극악무도한 대형 살상사건들로 지구촌이 피로 물들고 있다. 불과 보름동안 360여 명의 인명이 극단적 테러분자들에 의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최후발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보다 더 한 살상이 없으리라고 누가 보장하랴,
오늘, 하나님은 중심에 화평을 기구하는 의인의 기도와 헌신을 찾는다. 누가 이를 위해 기꺼이 앞장서서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자원하겠는가, 화평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 누군가의 헌신적 결행과 희생을 요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악을 도말함은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인 열사람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역시도 변개함이 없으며 다만 땅에서의 열락에 취해 자기 이권과 주장에만 급급한 탐욕의 무리들을 향해 소리쳐 돌이킬 것을 촉구하신다. 더욱 확실한 소망과 비전이란 다만 신앙의 근본 마음자리가 영생하는 하늘나라에 있는 것임을. 이 땅의 생명은 잠깐이나 천국은 영원한 것임을...
하나님 아버지시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후 2015년 11월 19일
네팔 카트만두에서
김상봉 선교사

Reporter Sang-B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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