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생명의 말씀-엄기설 목사2016-05-20 09:24
작성자 Level 8

엄기설 목사 설교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요 15:1-8)

은혜에 대해서 승리의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반복되는 죄를 짓고 자기가 너무 미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하고 결심을 했지만 또 다시 넘어진 다음에 심각한 좌절을 겪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실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실 자신에게 실망하고 괴로워 하는 이들은 실은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 부분이 부족하네 하고 바꾸어 가야지 좀 더 노력해야지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숯으로 태어났습니다. 닦는다고 해서 하얀 비누가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타락 그게 우리 육이예요. 육에는 죽음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어요. 우리가 완전히 타락했고, 완전히 죽었고 우리의 육은 여전히 육이고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잘 몰라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기에게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기 성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나는 숯이 아닌 비누가 될 수 있다고 희망의 노래를 불러요.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무서운 죄는 살인, 강간, 도둑질 등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주를 바라보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초인데 이 기초가 분면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행위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안 지을 게요.” 하고 결단하고 다짐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는 주를 놓치지 않을 게요.”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신앙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애쓴다고 해서 사랑, 자비, 평화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유함과 해방과 행복이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분노, 판단, 정죄, 원망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자연스럽게 걸어갈 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안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듯이 우리 스스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인줄로 알고 착각하고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내가 길, 진리, 생명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괜찮은 모습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외형으로는 가장 예수님을 닮고 가장 하나님을 갈망하고 가장 신앙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인데 세리, 창기, 온갖 악과 더러움은 받아 주신 주님께서 외견상 그렇게 착하고 성실한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숯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규율이 많은 학교는 규율이 적은 학교보다 훨씬 더 문제아가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 하지마! 저것 하지마! 하면 더 일탈하게 되고 영혼이 더 망가지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신앙생활은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게 됩니다. 거기에는 관용과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 이것을 지켜 그러면 사랑해 줄게 그러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건을 걸으신다면 그것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한 가지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기만을 원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가지의 역할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연결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과 연결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이며 열매 맺는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죄를 지었을 때 우리의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실은 우리의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타락한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것이 우리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다면 그때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겸손하고 아주 용기 있고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본래 추하고 악하고 망가지고 파괴되고 죽은 것이 우리의 본 모습 즉 본질입니다.
여러분이 가끔 저에게서 좋은 부분을 볼 때가 있을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는 저의 모든 아름다운 부분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빌려 쓴 것입니다. 제 것이 아니고 빌려서 받은 것입니다. 또 제게서 부족함이나 잘못된 부분이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연약함과 부족함이 나타난다면 그 모습이 바로 저입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나는 바뀌지 않습니다.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습니다. 성질, 음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거짓도 명예욕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그것이 바로 연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면 크게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그것이 원래 우리 모습인데, 그리고 넘어진 것도 한 두 번도 아닌데 마치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실망합니다.
우리의 육은 죽을 때까지 흙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넘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넘어지고 더럽고 약하고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것이 더 육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연결이 끊어진 것 주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진 것은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을 향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아직 승리의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뿔싸 내가 주를 놓쳤구나.” 이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를 개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은 절대 개선되지 않습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이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그 나무가 물가에 심겼느냐 시냇물과 연결이 되었느냐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초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주를 부르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루 24시간 주를 붙잡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지금 모든 시작이 실패하는 것은 기도 할 때 외에는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육은 패배하고 멸망하고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고 주를 붙잡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는 더럽지 않게 해달라고 음란한 생각이 다시는 나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혈기 부리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런 기도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이 옆에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단순히 그저 주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넘어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어떤 죄도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과 분리되어져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길을 걸으나, 잠을 잘 때, 꿈속에서도 하나님, 하나님, 예수, 예수, 예수 계속 예수를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열매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육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치는 그 순간 육이 나타납니다.
‘저 사람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얘기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거룩한 사람도 예수를 놓치면 다시 숯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베드로가 파도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가는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빠졌을까요? 파도와 바람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기술되어 있으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파도와 바람이 아닌 오리나 거북이나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나 그 어떤 것을 보았다 해도 그는 빠졌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어떤 것을 보았다는데 있지 않고 그가 예수님을 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삶은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합니다. 인간이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 기적은 예수님을 바라 볼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면 그 기적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운행하실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긍휼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되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손을 내밀어 주는 만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붙잡고 24시간 주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졌을 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또 주님을 바라보는 걸 잊었네요. 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넘어지는 게 저인데 또 주를 놓쳤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주님께 나아가세요.
너무 큰 죄를 지어서 너무 죄송해요. 주님께로 바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염려하고 자책하지 말고 넘어진 그 순간에 바로 주님께 나아가세요.
주님 또 깜박 주를 놓쳤어요. 이제 24시간 주를 놓치지 않게 애쓰겠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항상 주를 부르세요. 꿈에서도 부르세요. 저는 암투병 생활 후 밤낮으로 주를 부르며 잠이 들었어요. 주님, 주님 나를 주님의 사랑으로 정복해 주세요.
그렇게 주를 붙들지 않으면 죄를 지으니까요.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좋은 열매를 못 맺으니까요. 그저 밤새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하고 주를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죄짓고 넘어져도 낙심하지 마세요. 내가 원래 이렇지 뭐 주님을 붙들지 않으면 당연한 거지. 이게 원래 내 모습이지 그렇게 툴툴 털고 일어나서 걱정하지 말고 다시 주님을 향해 가세요. 주를 붙잡으세요. 이것이 복음의 기초입니다.
제게 어느 정도 열매가 있다면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로 종일 애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한 가지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성품에 문제가 있고 대인관계가 자유롭지 않은 이들 오직 예수를 붙들므로 많은 풍성한 열매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놓치지 마세요. 돈을 잃어도 목숨을 잃어도 예수를 놓치지 마세요. 이것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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