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온선칼럼-문찬우 목사 청담온선교회2015-12-17 10:09
작성자 Level 8

공감과 상상 (Sympathy &; Imagination)

마태복음 26: 41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박찬욱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누구냐, 너는?” 이라는 짧은 대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대로 말하자면, 그 ‘너’라는 사람은 질문자의 오랜 동창이기도 하고, 그의 원수이기도 하며, 잔혹한 테러리스트요, 동시에 상처받은 한 마리의 어린 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해 단언(斷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고, 한 마디로 처리해 버리려는 성급하고 거만한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멋진 사람도 되고 싶어 하고, 좋은 사람도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먹고 사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장발장이 따로 있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지난한 삶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거룩하고 높은 이상은 오간데 없고 마음 구석에 동물적 허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중간자적(中間子的) 존재입니다. 세속과 영성, 빛과 어두움, 지혜와 무지, 꿈과 절망 등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삽니다. 파스칼이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roseau pensant)라 부른 것은 결국 ‘한 사람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불어 인생에는 교통사고처럼 다가오는 불가항력적 문제들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것은 수월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나아가, 그 공감의 능력은 바로 ‘상상의 능력’입니다.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는 없어도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문학이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보통 문(文)사(史)철(哲)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역사란 인간의 본성을, 철학이란 인간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공부는 반드시 타인의 이해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누구냐 너는?” 이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누굴까 그는?”이라는 질문부터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연약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사랑 가득한 공감과 속 깊은 상상력’의 전형과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