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김창곤 목사, 믿는 자의 본이 되라2009-12-01 10:48
작성자 Level 8

김창곤 목사
서울강남제1지방회 회장, 서초순복음교회 담임

믿는 자의 본이 되라.
(딤전 4:11-13절)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지 말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본이 되어서 모든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서 너의 진보를 보이라" 라고 했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양무리를 섬기면서 군림하고 명령하고 주장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본을 보이는 목양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족식을 통해 서로 어떻게 섬기면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일상생활에서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9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믿음 안에서의 본이 되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1. 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은 '오직 말과'라고 했습니다. 언어에는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앙의 언어와 신앙적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언어를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언어 공해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언어순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하물며 성직자들이 거룩한 강단에서 세상에서 차마 못할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은 강단의 세속화요, 성직자 모독이요, 강단 모독이요, 하나님 모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단은 구약의 지성소와 같은데 언어 공해로 강단이 세속화 된다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언어가 있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말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말은 부정적이고 비 신앙적인 말, 거짓말, 분을 내는 말, 더러운 말, 악독의 말, 훼방의 말, 음해의 말, 탐욕의 말, 누추함의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우리 교단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발 붙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공동체에 큰 유익을 주는 말입니다. 긍정적이 말, 신앙의 말이 있습니다. 참된 말,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칭찬의 말,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 감사하는 말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기름지고 윤택하게 만들고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조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교회의 직분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지배 속에서 언어생활에서 본을 보이는 좋은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2. 행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은 '행실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행실에 있어서 아름다운 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받들어 섬기는 목회자들은 착한 행실에 언제나 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7)"고 했습니다.
세족식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의 지배와 기름부으심을 힘입어 행실에 본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사랑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은 '사랑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공동체인 하나님의 양무리를 사랑하고 민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랑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 안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사랑의 고갈이 가족공동체를 황폐화 시킵니다. 사랑의 고갈이 개인을 무정한 피폐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랑의 고갈이 부부간의 권태기를 야기하여 부부애가 사라지게 되고 불신과 미움과 짜증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가져오게 합니다. 사랑의 고갈은 사회계층간의 반목과 질시가 판을 치게 만듭니다. 사랑의 고갈이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냉냉한 형식적인 교회로 전락 시킵니다.

4.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은 '믿음과'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음에는 반드시 세 가지가 있어야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믿음의 대상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그라운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셋째는 대상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게 됩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물건을 분실 했을 경우에는 주인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면 가장 소중한 귀중품일수록 그분에게 맡겨야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적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말고,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책망받는 믿음이 아니라 칭찬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믿고 구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5. 정절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은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라고 했습니다. 정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정절'이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정절을 지키지 못해 맷돌가는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육체의 정절을 지킴으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칠십인의 가족과 애굽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됐습니다.
둘째는 '민족적 정절'이 있습니다. 바울은 민족적인 정절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도 민족적 절개를 지킨 신앙인이었습니다(히 11:24).
셋째는 '신앙적 정절'이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비록 바벨론 포로였으나 그는 비굴하게 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우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은 하나님의 종들은 정절에 있어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25퍼센트의 기독교 신자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마음을 다해 한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올바른 제도를 지켜 나간다면, 우리나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인류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 선생님이 영적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너는 나를 본 받으라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양무리를 섬겼는지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바울 선생을 닮아 주님의 올바른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