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생명의 말씀-이광석 목사2015-09-09 10:39
작성자 Level 8

우리의 반석은 십자가
(마 7:23-29)

이광석 목사
서울서부지방회
순복음승리교회

성추행의 누명을 씌운 음부에게 한마디의 변명을 하지 않음은 물론 법정에서도 음부의 행위를 입 밖에 내지 않고 묵묵히 감옥에 들어가는 요셉의 모습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봅니다. 그리고 형님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죽음을 모면하고 죽음보다 더욱 몸서리치는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생이별, 가족과 가정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절망은 어린 요셉에게는 견딜 수 없는 죽음 앞의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아픔을 가슴에 지니고 있음에도 애굽에 양식을 구하려고 찾아온 형님들의 악행을 “하나님의 의도니 형님들은 두려워 마십시오” 하는 요셉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1. 그 사랑의 고백은 좁은 문 앞에서 시작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누군가를 사랑하며 용서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이 듭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힘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이고 외각 멋진 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전화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와서 건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온 집안의 경사로 알고 환영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하던 전우 한 사람을 데리고 집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전우는 왼쪽 눈, 왼팔, 왼쪽 다라 하나씩 절단된 부상병인데 갈 데가 없으니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해주세요.” 이런 내용의 부탁 전화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며칠이나 몇 달 동안은 몰라도 평생을 그 전우와 함께 지내게 된다면 너나 우리 집 식구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야.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란다. 너나 빨리 집으로 돌아오렴.” 이 말을 들은 아들이 “알았습니다” 하고 전화를 딱 끊었습니다. 그 이튼 날 해군본부에서 충격적인 전보가 날라 왔습니다. 그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왼쪽 눈과 왼팔, 왼쪽 다리가 없는 부상병은 전우가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아들의 요구를 거부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라고 한다면 세상의 어느 누가 이러한 이야기에 마음을 두고, 사랑의 길에 서겠다고 하겠습니까? 저도 이러한 상황을 생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생명을 얻고 반석을 향한 걸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은 우리의 힘으로 들어가기가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인 성령의 약속을 찾으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2. 그 약속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실에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린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과 7장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을 하시는 반석을 향한 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결실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길에 서려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가슴으로 구하고 손과 발로 찾고 믿음으로 기도를 하라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감각을 누리려면 성령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성령님과의 관계의 조건을 고전 12:31에서 사도 바울이 그 길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제일 좋은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그 길은 고전 13:4-7까지의 사랑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더욱 큰 은사’입니다. 또 제일 좋은 길을 우리에게 보이신 영생의 길입니다.

3. 그러기에 더욱 큰 은사는 우리에게 자유와 유익을 얻게 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종교인들이 행하는 인내와 용서와 사랑 그리고 관용 등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나름대로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지는 상황일 뿐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허한 마음만 그 들의 가슴에 가득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랑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이끌어 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생명의 길이 되는 사랑의 주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 이름을 믿음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더욱 큰 은사의 길은 성령님으로부터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은사 중에 가장 귀한 우리가 누려야 할 은사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
오늘 우리에게 사랑이 은사로 주어진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오래 참는 은사 교만치 않는 은사 성내지 않는 은사, 믿어주는 은사, 견디어 주는 은사 등등 모든 사랑의 은사가 주어지면 예수님 같은 모습일 텐데요. 얼마나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주렁주렁 열려 있어서 많은 이들이 와서 성령의 열매를 얻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랑을 하는 만큼 지경은 넓어집니다. 사랑의 행동거리 만큼 자유함이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 만큼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로 오르셔서 안식을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시고 오늘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으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안식을 회복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반석은 예수님의 터전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모세가 왕궁을 포기한 것처럼 성도님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향해 지금까지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이기에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오늘도 성도님들은 사랑을 실천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죽음에 길임에도 성도님들은 그 죽음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오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죽음의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갔듯이 죽음이 기다리는 로마를 그리워했듯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좁은 문입니다. 사랑은 좁은 문입니다. 사랑의 넓이만큼 우리에게 자유와 영생이 있습니다. 좁은 문은 사랑으로만 열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넓이만큼 좁은 문은 열립니다. 사랑만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봅시다. 십자가 위에서는 모든 것이 잘 보입니다. 십자가는 들려야하기에 높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이 들렸기에 우리도 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우리의 반석은 십자가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