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목양칼럼-일본 카시마순복음교회 이환권 목사2015-06-16 17:21
작성자 Level 8

율법을 이루고자 살인을 꾀하는 자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 12:14)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정체성에 심히 위배되는 의중과 행동을 묘사하는 마태의 기록은 참으로 씁쓸하고 경악스럽다. 그들이 이러한 악행을 도모하게 된 배경은 마태복음 12장에서 두 개의 사건과 연결된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고픔을 인해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며, 두 번째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두 사건 모두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며 예수님을 비난했었다. 그러나 율법의 규정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었고(신 23:25), 안식일에 곡식을 수확한 것도 아니었다(출 34:21).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해석적 틀과 유대적 전통을 빙자하여 불법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예수님은 성경에 근거하여 그 적법성을 네 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해주셨다. 1)다윗의 예(v3-4) 2)제사장들의 예(v5) 3)선지자들에 근거한 증명(v7) 4)자신을 통한 증명(v6,8)이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명료한 논증과 더불어 예수님은 “너희가 (율법을) 읽지 못하였느냐(v3,5)”라고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깨달음과 분별을 촉구하셨다.
자기 의에 빠진 그들의 마음에는 분별과 겸손이 없었다. 그들은 이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묻는다. 불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음을 말씀하시며 고쳐 주셨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행치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명하심으로써 그들이 옳지 않음을 폭로하셨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보다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에 더 충성된 자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적인 모습은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집요한 훼방꾼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셨고 분별을 촉구하셨다(마 12:5-8).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책잡아 송사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율법적 의와 합법성을 빙자하여 주장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예수님의 말을 트집 잡고 회당 등의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옳음과 옳지 않음을 논하며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고 예수님을 불의한 자로 매도했다.
이러한 그들의 행태는 진리와 옳음에 대한 추구이거나 그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의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행태는 예수님과 그분을 지지하고 따르려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분열과 혼란을 획책하여 자신들의 악한 꾀를 이루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실상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며(눅 16:14),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었음을(마 23:23)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흉계와 음모가 깊은 만큼 그들의 자기 의적 목소리는 더욱 커갔다.
예수님의 사역과 선량한 백성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자신들의 흉계를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cf. 마 23:25-33). 언제나 관용과 사랑으로 용납하기를 기뻐하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한계를 아셨지만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관용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영접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적함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교활한 위선과 자기 의적 처신으로 선량한 백성들의 마음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저의와 태도를 폭로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체제를 강화하고 백성과 종교적 율례를 빙자하여 모세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함을 알고 계셨다(cf.마 23:2).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함과 참된 성품마저도 역이용하려는 간교한 자들이었다(cf.마 22:16). 그러므로 계속 용납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걸림이 되며 백성들에게 해가 될 것을 아시고 잘못을 명백히 지적하시며 폭로하셨던 것이다.
  흔히들 똘레랑스(tolerance)는 앵똘레랑스(intolerance)에 대한 칼이라고 한다. 정치나 종교적 영역의 포지션(position)에 따라 적용 초점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말은 기본적으로 관용과 이해의 중요한 가치도 그것을 대적하는 불관용과 아집으로 이설(異說)을 통해 참된 가치와 화합을 저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칼은 그들의 악함에 대한 폭로였다.
참된 관용과 사랑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악한 이설과 자신만을 중심에 둔 교만하고 불의한 의도는 폭로되어야 한다. 그리고 폭로는 이제 명백한 결단을 요구한다.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그 악함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것인가. 바리새인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그것이었다. 그들은 이후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 대해 흉계를 꾸민다(마 12:14).
이 맥락에서 마가는 그들이 입만 열면 떠드는 율법을 거스르는 살인모의로 나아가는 가운데 헤롯당과 함께 모의했다고 폭로하고 있다(막 3:6).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시 1:1). 애매모호함이 미덕인 것 같은 시대에 우리는 악을 폭로하고 의에 거함으로써 예수님의 공동체에 참된 똘레랑스를 신장시키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말뿐이 아닌 합당한 행실로 악을 대적해야 한다.
화합을 말하면서 분란을 획책하는 것, 말로는 교단의 미래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교단의 화합을 훼방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단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위임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우리 교단의 교리적, 윤리적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