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목양논단-안기호 목사(총회신학원 학감)2013-07-25 09:11
작성자 Level 8

순종하는 삶

예수님은 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 이유는 한 가지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고,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에 빠진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아담과 똑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으며, 세상을 위해 구원을 길을 여는 의로운 일에 성공하셨다. 예수님의 이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 의(義)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담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성공하신 원인은 무엇일까? 이 말은 아담은 무엇에 실패했고, 예수님은 무엇에 성공한 것인가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성경은 그것을 ‘순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순종에 실패했고, 예수님은 순종에 성공하셨다는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세상은 정죄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세상은 다시 의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순종이란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고, 순종이란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규범적 계율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는 바울의 말대로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은 불순종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순종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은 불순종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순종이라는 표현이 절대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정확한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순종과 불순종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담이 불순종한 근본 이유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아담이 불순종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높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삶의 초점이 자기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원하신 것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창1:26)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게”라는 말의 의미는 창2:15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 구절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로 번역했으나 개정개역은 원어의 의미를 살려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로 수정 번역해 놓았다. ‘경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베다흐’(&;#1491;&;#1492;&;#56193;&;#56616;&;#64303;&;#1500;)는 ‘아바드’(&;#1491;&;#56193;&;#56616;&;#64303;)의 단순 부정사인데, ‘아바드’는 ‘경작하다,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다. 그리고 ‘지키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메라흐’(&;#1492;&;#1512;&;#1502;&;#64298;&;#1500;)의 어근은 ‘솨마라’인데, 그 뜻은 ‘울타리를 치다, 보존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조금의 손상도 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아끼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담은 에덴 동산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보전하기 위해 섬기고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보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보전하기 위해 섬기고 보살피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잘 되게 하려는 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첫째는 항상 하나님만을 높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섬기고 보살폈어야만 했다. 하지만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잘 되게 하려는 데 생각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불순종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인 것이다. 이런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여전히 불순종 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언젠가 한 집회에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를 본 적이 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이지 성도들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목사님을 가리켜 ‘종’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목사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표현이다. 여러분은 목사님을 ‘주의 사자’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이 말씀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는 우리를 선전하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우리를 나타내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 누구도, 즉 아무리 설교를 잘 하고,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고, 목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위대한 목회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높여지고 관심의 초점이 되어져서는 안 된다. 오직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예수님만 나타나고 높여져야 한다. 우리(바울을 비롯한 목회자들)는 여러분(고린도교인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할 뿐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첫째로 주님만을 높이고 있고, 둘째로 자신은 주님의 종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종으로도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초점이 주님과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과 일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종의 삶이 교회, 즉 먼저는 목회자들과 나아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책무인 것이다. 이 책무를 잘 감당한 자에게는 큰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는 특권적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 거룩한 책무를 완성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을 낮추셨다는 말은 당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 속에 담겨있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당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자기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에서 나온 희생적 행위였다. 바꾸어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는 삶의 초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은 십자가가 바로 순종의 표상임을 교훈한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는 말씀에서 그 복종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 동등 됨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인자(人子)로써 성부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은 철저히 낮추시고 오로지 하나님만 높이셨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순종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나는 죽고 다른 사람은 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행위의 초점이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기 스스로를 높일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도 없다. 그것은 아담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철저히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생명을 얻게 해 주는 일에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바로 이런 자세를 갖추고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이 순종의 삶에 성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순종의 삶에 성공한 사람들을 높여주시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