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칼럼

제목설교-강태진 목사2013-08-24 08:24
작성자 Level 8

그리스도인의 소망
(빌3:7-12)
강태진 목사
안동성곡교회

요즈음 지자체마다 쓰레기 처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쓰레기가 얼마 전까지만 사랑받고 잘 사용했는데 기한이 지나니 어느새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잠깐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요, 지위, 명예, 건강, 가치가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 그런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고 그 가치와 비교하니 그것이 무엇이든 다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부활을 믿고 그 진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한번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벧전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영적인 세계는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러분 가운데 과거에는 부활이 안 믿어져도 지금은 분명히 믿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부활의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진리를 믿게 하지만 마귀는 그 반대로 인간을 거짓으로 속입니다. 사람들이 미신을 얼마나 잘 믿나요? 그래서 굿하고 점 칩니다. 부적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삽니다. 돼지머리를 차려 놓고 복 달라고 빕니다. 한번은 어느 정비공장에 갔더니 완전 박살난 차 핸들에 명태 한 마리가 실에 단단히 묶여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을 통해 오는 느낌은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다 말라빠진 명태가 뭘 해준다고 운전대에 묶어 두냐? 제발 이 짓 그만해” 명태는 두들겨 패서 국을 끊이는 음식이지 복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을 충동하여 아무 내용도 없는 점, 굿, 부적, 고사를 자주 지내면서도 전혀 안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했던 로마의 역사가 예수 부활을 증명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실을 입증할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공동 묘지 아래에 굴을 파 만든 지하의 숙소인 카타콤, 기독교인을 죽이려고 굶주린 맹수를 풀어 놓아 죽였던 현장 콜로세움이 버젖이 관관객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그렇게 박해했던 로마가 오히려 기독교를 역사의 원년으로 기록한 기독교 연호를 씁니다. 어느 나라나 황제가 바뀌면 황제의 연호를 씁니다. 세계 연호가 2013년은 예수님의 년호입니다. 그래서 AD 2013년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Anno Domini]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박해해도 죽음을 이길 부활 신앙은 꺽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역사가 부활의 신앙에 꺽이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의 뿌리는 부활입니다.
(히11:35-37)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그러므로 부활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절망에도 꺽이지 않고 들풀처럼 견디며 죽음의 공포 앞에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일본 열도를 강타한 쓰나미는 전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해일 앞에 거대한 배들은 종이 조각처럼 꾸겨져 물에 잠기고, 자동차는 나무토막처럼 딩굴며 떠내려갑니다. 소리없이 잠겨버리는 주택 단지, 빌딩, 이어서 치솟는 원전의 불기둥....그러나 이 충격적 광경은 공상 영화가 아닌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피해가 없었고 강 건너 불보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 인류가 경험하게 될 충격적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의 부활이란 영광스러운 부활로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슴에 품었던 부활 신앙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심판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을 담당하고 심판을 받았으니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상급과 영광뿐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부활을 받을 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응분의 판결을 받아 영원히 그 죄 값을 치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모르고 왜 죽는지를 모르고 세상을 따라 흔들리며 살다가 자신의 생명과 삶의 영원한 주인 앞에 서서 받는 형벙를 받기 위한 심판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소망의 절정입니다. 만약에 부활을 빼고 기독교를 말한다면 내용이 빠진 빈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믿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한 때는 지독한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완전히 죽었는다고 생각했고 부활이라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무리들을 다 체포하는 일에 앞장을 선 사람입니다. 어느 날 기독교인을 체포하려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납니다. 그의 삶의 가치가 뿌리 채 변하는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자신도 그 사실을 믿음으로 그 부활에 동참할 수 있음을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 그가 붙들었던 모든 가치는 배설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을 생의 결승점으로 정하고 질주한다고 합니다. 큰 배가 작은 풍랑에 쉽게 흔들리지 않듯이 말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인생은 어떤 시련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4) 그리스도인의 절대 소망은 부활입니다.